꽃달이 뜨는 밤.
화(花)가야의 밤하늘 위에 꽉 찬 둥근 달이 걸렸다. 그리고 달의 주변으로는 하얀 달무리 대신 갖가지 꽃송이의 꽃무리가 떴다. 달만큼이나 밝게 제각각의 빛을 내는 꽃송이들. 밤은 까만데 꽃달 주변은 온통 불꽃놀이라도 하는 듯 화사했다.
매달의 마지막 날, 화가야의 밤하늘에는 꽃달이 떴다.
화가야의 궁궐인 태양궁.
그중에서도, 유일 왕자 겸의 궁실인 양화관(陽花館)의 내실.
내실의 방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들어섰다. 하얀 자리옷을 입은 여인은 이부자리에 누운 겸의 곁으로 다가갔다.
물끄러미.
여인은 잠이 든 겸을 한참을 바라보더니 몸을 낮추어 앉았다. 그리고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겸은 잠에서 깨어났다.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알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겸의 심장 가운데로부터 찌릿찌릿 전율이 퍼져 가기 시작했다. 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여인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겸의 손길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오슬오슬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겸의 코끝에 와 닿았다. 마치 수백 송이의 꽃잎을 향낭에 넣고 흔들어대는 것처럼 짙고도 어지러운 향기. 세상 그 어느 꽃향기보다도 더 매혹적인 향기가.
그리웠다. 네가 많이 그리웠어. 기다렸다. 내 너를 오래 기다렸어.
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인의 얼굴이 겸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여인의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족쇄처럼 겸을 가두고 겸은 여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후, 겸의 숨결이 달뜨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을 밀어내며 가만히 쳐다보더니 여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맞닿은 입술은 달았다. 마치 꿀을 찾아서 더듬이를 팔랑이는 나비처럼 겸의 입술이 여인의 입술 위에서 미끄러졌다. 여인의 목덜미를 안아 쥔 겸의 손가락 사이에서 윤기 나는 붉은 머리카락이 흘렀다.
우수수!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꽃잎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은 꽃잎이었다.
떨어져 내린 꽃잎들은 겸의 어깨 위에, 팔뚝 위에, 가슴팍에 쌓여갔다. 겸과 여인 사이에는 놀랄 틈도 없이 커다란 꽃자리가 만들어졌다.
순간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겸은 여인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손끝 하나 달싹일 수가 없었다. 발소리도 없이 여인은 겸에게서 멀어져 갔다.
“가지 말거라! 가지 말아!”
겸이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여인의 몸은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가지 마! 제발!”
겸의 목소리가 어느새 물기에 젖었지만 멀어지는 여인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겸의 심장이 두 개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극심한 통증은 목이 마르게 치밀어 올랐다.
“제발!”
비명 같은 절규를 내뱉으며 겸은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간에 내실을 둘러보았다. 넓은 내실 안에는 겸 혼자 잠들어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겸의 꿈이었다.
밝게 빛나는 꽃무리를 거느린 꽃달이 뜨는 밤이면 늘 꾸었던 꿈.
어김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겸은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만져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에 양 볼이 흥건히 젖었다.
“도대체 누구냐? 넌……?”
아직까지도 심장의 통증이 얼얼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달뜬 숨결은 여전히 가쁘게 오르내렸고 입술에 남은 여인의 향기도 그대로였다.
여인을 향한 겸의 갈망은 잠까지 깨뜨릴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봄의 셋째 달, 오월의 하늘에는 연노랑의 구름이 떴다. 겸은 시종장과 함께 내화원(內花園)을 산책하고 있었다.
머리 뒤로 반만 묶어 어깨를 따라 늘어진 겸의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한쪽만 쌍꺼풀이 진 눈의 먹물 같은 눈동자에는 긴 속눈썹이 그늘을 드렸다. 얼굴 가운데에 오똑하게 자리한 콧날은 반듯했다. 단정하게 맞물린 입술은 꽃빛이었다.
가야의 복색을 그대로 따른 왕자포의 가슴에는 흰나리(백합)를 수놓았고 양어깨에는 왕실 문장인 수정나비가 내려앉았다.
팔랑! 팔랑! 팔랑!
겸의 흰나리(백합) 향에 홀린 나비 떼가 수풀처럼 날아들었다. 팔가리개를 했는데도 나비 떼들은 겸의 향기를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성큼성큼 놓이던 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어깨 위에 앉은 수정나비 한 마리를 검지에 앉히더니 입 쪽으로 가져갔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뭐라고 속삭였다.
팔라라라랑-!
겸이 손을 한 번 젓자 손가락에 앉았던 수정나비가 공기 중으로 날아올랐다. 겸을 감싸고 있던 모든 나비들도 동시에 몸을 날렸다.
“무어라고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매번 보는 풍경인데도 시종장은 볼 때마다 넋을 놓았다.
“내화원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을 찾으라 했네.”
“네? 온통 꽃 천지인 꽃 궁실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이라니요?”
내화원은 태양궁의 꽃 궁실이었다.
“가르치지 않아도 꽃은 나비를 부르고 나비는 꽃을 찾는 법. 꽃의 아름다움을 제일 공평하게 평가할 이는 바로 나비가 아닌가?”
“짓궂으시옵니다.”
“하하하! 수정나비들의 섬세한 눈을 믿는 것이라네. 꼬박 이 년이 넘도록 와보지 못한 내화원이 아닌가? 혹 진귀한 꽃이 들어오지 않았을까 적이 궁금하네.”
“꽃가루 염증병은 참말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이렇게 꽃 사이를 걷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것을 시종장도 보고 있지 않은가?”
한창 말이 오가는 중인데 저만치 공중에 나비 떼가 벌써 멈추어 있었다.
“어떤가? 시종장! 나비들이 벌써 찾아내었네.”
손을 들어 가리키는 겸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가보세. 우리 수정나비들이 얼마나 섬세한 안목을 지녔는지.”
겸이 앞장서 걸어가자 시종장은 조금 떨어져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나비 떼는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팔자를 그렸다가 하면서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나비들이 모여든 곳은 꽃잎 위가 아니었다. 나비 떼가 가리키는 곳에는 등을 돌린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이런! 오늘은 수정나비들이 실수를 하였군!”
겸의 입술이 더 부드럽게 풀리면서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각! 사각!
하며 겸의 심장이 소리를 냈다. 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각! 사각! 사각! 심장이 다시 소리를 냈다.
뭐야? 왜?
겸이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주춤거렸다. 심장에 손을 얹으며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겸은 가던 길을 바꾸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저 여인 때문에?
겸의 인기척을 느낀 여인도 몸을 돌렸다. 겸을 발견한 여인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여인은 스물이 갓 된 듯 보였다.
단을 드리운 머리카락은 밤처럼 까맸다. 방금 씻은 듯 말갛고 투명한 피부에 양 볼과 입술은 요사스러울 만큼 붉은색을 지녔다. 세상의 여인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드러난 얼굴 밑과 목, 손등이 온통 퍼런 멍투성이었다.
“누구냐? 넌?”
여인은 궁녀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민가의 백성들이 입는 치마, 저고리를 입었다.
“…….”
한낮의 화가야 태양궁에 왕족도 아니고 궁녀도 아닌 여인이라니?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내화원에? 게다가 저 멍투성이의 모습까지?
“왕자님! 오셨나이까? 꽃가루병이 다 나으신 것이옵니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서 있는 겸의 곁으로 다선이 다가왔다. 내화원의 화원장인 다선은 스물네 살인데 겸만큼이나 수려한 외양을 지녔다. 일을 하다가 왔는지 팔에는 토시를 끼고 있었다.
“다선!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인가?”
다선의 대답이 쉽게 건너오지 않았다. 다선 또한 겸만큼이나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찌 답이 없는 것인가?”
“궁 밖에서, 데려, 온 저의, 사람, 이옵니다.”
당혹스러움을 걷어낸 다선이 망설이듯이 여인을 소개했다.
“태양궁에 있는 여인이 어찌 화원장의 사람이란 말인가?”
“기억을 잃고 저자를 떠돌던 아이이옵니다. 내화원의 일손을 도우라 제가 거두었습지요. 태양궁의 녹을 먹지 않사옵니다.”
“그래?”
“예를 갖추거라. 화가야의 유일 왕자님이시니라.”
겸을 지나온 다선의 말은 여인에게 와 닿았다. 여인이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러자 알 수 없는 향기가 진동을 했다.
사각, 사각, 사가가가가각.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였다. 게다가 여인의 온몸을 감싼 흉한 멍 자국조차 겸에게는 안타깝고 아련하기만 했다. 심장의 소리가 더 심해졌다.
“이, 이름이 무엇이냐?”
겸의 시선은 여인에게 고정되어 박혔다.
“솔나라 하옵니다.”
“다선을 따라 궁에 들었다고?”
“그러하옵니다.”
“궁에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되었고?”
“두 달포(달) 조금 지났사옵니다.”
“내화원의 일을 도우는 것은 즐거우냐?”
“기쁘게 하고 있사옵니다.”
솔나의 향기가 겸을 놓아주지 않았다. 사각거림이 멈추지 않는 심장도 이유를 모르겠다. 겸의 시선이 꿰뚫듯 솔나를 바라보았다.
“화원장!”
“네.”
“내 이 아이를 양화관으로 데려가겠네.”
그래서 겸의 입에서는 어이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왕자님의 궁실로 말이옵니까?”
“그렇네.”
“아니 되옵니다.”
“어째서?"
“궁녀가 아니라 아뢰었사옵니다.”
“상관없네.”
“모습을 보시지요. 왕자궁에 들 자격이 없는 아이입니다.”
“그 또한 내는 상관없네.”
“왕자님께는 상관이 없을지 모르오나 궁궐의 법도가 그렇지 않사옵지요.”
“화가야의 유일 왕자야 그 법도 밖에 있는 사람이지. 내가 괜찮다 하면 이 아이 또한 상관이 없는 일. 마침 양화관의 뜰을 다시 복구하여야 해서 일손도 필요하던 참이네.”
“그 일이야 소신이 하옵기로 이미…….”
“되었네. 자네야 내화원 보살피기에만도 여념이 없을 터. 자네 밑에서 화원 일을 배운 아이라면 양화관 뜰도 잘 되살려 놓을 테지.”
“아직 일손도 서툰 아이이옵니다.”
“되었다니까.”
“왕자님!”
키가 큰 두 남자가 자그마한 솔나를 사이에 두고 팽팽하게 긴장했다. 겸의 입가에, 다선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좋네. 정히 그러면 솔나에게 물어보세. 나를 따라나설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
겸의 고집이 꺾일 생각이 없었다. 그 고집을 느낀 다선이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솔나야! 어찌할 테냐? 왕자님을 따라갈 테냐?”
한숨 끝에 솔나를 쳐다보는 다선의 눈빛에 수심이 어렸다. 싫다고 답을 하라고 눈으로 말을 했다.
“태양궁의 주인이신 왕자님의 명. 어찌 미천한 몸이 가부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솔나의 대답은 겸을 따라가겠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쩌시려고?’
묻지도 못하는 다선의 수심이 동굴처럼 깊어졌다.
겸의 궁실인 양화관.
꽃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데 궁실 입구부터가 온통 나비 천지였다. 접었다 폈다 여섯 쌍의 날개를 가진 휘나비, 더듬이 대신 작은 뿔이 달린 소나비, 꽁무니에 깃털이 늘어진 깃나비, 무엇보다도 온몸이 백수정처럼 반짝이는 수정나비까지. 겸 때문에 양화관 전체가 흰나리 향기에 젖어 있었다.
왕자궁의 총괄을 맡은 궁녀장 홍화의 음성이 서고를 넘어 나왔다.
“왕자님! 아니 될 말이옵니다. 저런 근본도 없는 아이를 왕자궁에 들이시다니요? 제가 이 양화관의 궁녀장으로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옵니다.”
“일궁녀(태양궁 최하위 궁녀) 아이 하나 들이는 일이에요. 어찌하여 궁녀장까지 이리 성화이시오?”
“한낱 일궁녀가 아니니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시종장이야 왕자님의 뜻을 따랐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아니옵니다. 저런 아이를 들이시겠다니요.”
“도대체 저 아이가 왜요?”
“모르셔서 하문하시는 것이옵니까?”
“…….”
“왕자님!”
쳐다보는 홍화의 눈길이 사나워지도록 겸은 답이 없었다.
“왕자님!”
다시 한 번 홍화가 힘주어 불렀다.
“이모님!”
높아지는 홍화의 음성에 겸이 그녀를 이모님이라고 불렀다. 그 부름에 홍화의 음성이 잦아들고 말았다. 말을 멈추고 숙인 자세 그대로 자리에 앉은 겸을 보았다.
양화관의 궁녀장 홍화.
그녀는 겸의 모후인 옥화의 손아래 동생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모후를 잃은 겸이 세 살이 되던 해에, 홍화는 겸의 양육을 맡았다. 홍화의 손길 아래 겸은 성장하였고 양화관의 궁녀장이 되어 지금까지도 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모님! 그냥 뜰을 보살필 궁녀 아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왜냔 말이옵니다. 저잣거리를 떠돌다가 내화원에서 흙일이나 보던 아이이옵니다. 몰골 또한 심히 상하였지요. 신과 심, 지와 덕을 골고루 겸비하지 못하면 왕실 직계의 궁에서는 허드렛일도 할 수 없음을 왕자님도 아실 것이옵니다.”
“그냥 곁에 두고 싶은 아이예요. 좀 지켜봐 주면 안 되겠어요?”
“그냥이라니요? 사리에 맞지 않으시옵니다.”
겸의 투명한 눈빛과 홍화의 젖은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홍화는 그 눈빛에서 언니의 마지막 눈동자를 떠올렸다.
흰나리 문양을 지니고 태어난 왕자를 자신에게 부탁하던 언니의 마지막 눈빛. 서럽고 아렸던 눈동자를.
‘휴!’
홍화가 한숨을 삼켰다.
“이모님!”
“명 받자옵지요. 하나 당장 일궁녀의 직분을 내릴 수는 없사옵니다. 그리고 언제든 조그만 문제라도 생기면 즉시 내치도록 할 것이옵니다.”
홍화의 말이 그리고 눈빛이 다시 궁녀장으로 돌아왔다. 겸에게 예를 올리고 서고를 나섰다.
양화관의 앞뜰에는 솔나와 몇 일궁녀들이 홍화의 처분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홍화의 눈길이 솔나에게서 멈추었다.
조금 전, 겸을 따라 양화관에 들어서던 솔나를 보았을 때, 곤두박질치듯 아득했던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홍화는 솔나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멍투성이의 흉한 모습. 하지만 외면할 수가 없었다. 홍화는 그것이 속이 상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솔나라 하옵니다.”
“자고로 왕실 직계의 궁에 시중을 드는 궁녀는 심신과 지덕에 결함이 없어야 한다. 알고 있느냐?”
“네.”
“너는 이미 얼굴과 몸에 흉을 지니었다. 양화관의 궁녀로서 어림도 없는 처지란 말이다. 하니 다른 궁녀들보다 더 삼가고 더 겸손하게 양화관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네.”
그렇게 솔나는 양화관의 뜰 담당이 되었다.
늦은 오후.
겸은 왕실 가족 성찬을 위해 왕자포(袍)를 입고 내실을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비 떼가 일제히 겸에게로 날아들었다.
솔나는 아직도 뜰에 있었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데 어깨가 조그마했다. 겸은 시종장을 잠시 기다리게 하고 솔나에게로 다가갔다.
“솔나야! 일은 고되지 않으냐?”
면장갑을 낀 손이 온통 흙투성이인 채로 솔나가 일어섰다.
“아니옵니다.”
“오후부터 내도록 뜰에 있었던 듯한데.”
“네.”
“쉬엄쉬엄하려무나.”
햇빛에 익은 탓인지 멍이 내려앉은 얼굴이랑 목이 더 퍼렇게 보였다. 겸의 마음에 가여움이 스몄다.
“넌 참말 가족이 하나도 없는 것이냐?”
왕실 가족 성찬에 가려던 길이라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처음 기억부터 홀로 저자를 떠돌며 살았사옵니다.”
“아무리 그렇기로 낳아준 부모님은 있을 것이 아니냐?”
“부모 없이 난 이가 하늘 아래 있을까마는 작은 기억 한 조각도 없사옵니다.”
“그래. 앞으로는 이 양화관이 너의 집이고 이곳의 궁인들이 너의 가족이란다.”
“감읍하옵니다.”
솔나가 고개를 숙이는데 머리카락 끝이 스치듯 왕자포에 닿았다.
“왕자님! 이만 납시옵소서.”
시종장이 채근을 하자 겸은 발걸음을 옮겼다.
‘겸 왕자님!’
겸의 이름을 속삭이는 솔나의 입가에 오월의 봄바람이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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