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는 절반의 진리를 사용한다. 생각의 과정을 왜곡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창조된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단 한 가지 생각이 개인의 운명을 더 좋게도 더 나쁘게도 바꿀 수 있다. 한 가지 생각과 제안에 내포된 힘은 그 속에서 그대로 유지되다가 결국 어떤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잠재력이 존재하고, 또 그것이 온전히 성취되는 방식으로 우리가 생각을 통제하고 이끌 수 있다면, 얼마나 강력할 것인지 상상해 보라.
불안은 자기 삶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불안한 이들은 결국 다른 이들이 그 마음속에 직간접으로 주입한 생각을 받아들인다.
---「들어가는 글」중에서
로마서 12장 2절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거듭날 때 이전 것들은 지나갔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바로 그날 모든 것이 완전히 변화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지속적인 변화는 성령님의 몫이다. 그분은 우리의 두뇌에 낀 먼지를 제거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모든 오해를 제거하는 사역을 시작하신다. 결정적으로 마음의 변화가 올바른 생각에 자리한 힘을 성숙시키고 실재가 되게 한다.
잠언 23장 7절은 사람은 그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대로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없다. 타인과 자신에 관해 늘 생각해 오던 방식을 고수하도록 내 마음이 형성되어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렌즈를 통해 볼 수도 없고, 나를 위해 그분이 보물 창고에 쌓아 두신 것을 볼 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독특하고 특별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만드신 그대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감정적으로 건강하고, 영적으로 건강하게 자신을 봐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형상’은 히브리어로 ‘∽의 그늘’이라는 뜻뿐 아니라 ‘상상력’ 또는 ‘생각’이라는 뜻도 있다. 글자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으로서 존재한다.
우리가 품위를 손상시키고, 깎아내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배치되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면 죄를 짓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던진 상처되는 말은 그 순간에는 뭔가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과 함께 시작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우리의 영혼이나 지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저수지에서 흘러나온다.
---「1장 올바른 생각의 힘」중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유해한 생각을 처리해야만 한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진실인가? 진리는 정보가 아니라 진리의 영이라 불리는 하나의 인격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사실은 어떤 것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솔직히 옳을 수도 있다. 반면에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보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보는 방식이다. 사실은 내가 뭔가에 관해 느끼는 방식일 수 있지만, 궁극적인 근원은 분명 성령님이시다.
창조적인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에게 생명과 방향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곧 그분이 우리에 대해 갖고 계신 생각으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창조되었다. 그분의 생각은 항상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생각은 생명을 주는 권능과 목적으로 충만하다.
당신을 디그레이드(degrade)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업그레이드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 혹은 생각으로 변화시키신다. 이것이 성령님께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당신을 잡아끌어 감정적으로 무너지게 하는 생각과 맞설 수 있는 다른 생각을 그분이 보여 주실 것이다.
문제를 다루려면 당신에게는 수준 높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임재를 크게 하면 그 문제가 가려진다. 주님을 크게 한다는 말은 그분을 문제보다 더 크게 한다는 뜻이다. 해결책이 커지면 문제는 작아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과 함께하면서 시너지를 낸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이나 인상에 속하는 감각을 계발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훌륭한 미래는 당신을 창조하신 그분과 함께하는 친밀한 관계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장 정결하게 하시는 성령님」중에서
나는 우리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가 창조되었고, 상상력은 우리가 될 수 있는 바에 대한 예언적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머니 태에 들어가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셨다. 이러한 시각은 하나님이 얼마나 엄청난 분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보여 준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생각은 축복이지 재앙이 아니다. 그분의 상상력이 우리 안에 풀리면, 우리는 우리의 예언적 운명을 알 수 있다.
문은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우리에게도 눈, 귀, 입을 통해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방패 또는 믿음의 방패라고 부른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그리스도가 생각하시는 바를 포착하고 싶으면, 생각으로 유입되는 것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3장 사랑의 힘」중에서
환경이 왜 우리를 거슬러 돌아가는지 우리가 항상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소한 하나님이 우리의 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분은 우리가 사는 동안 언제나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입에서 찬송이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4장 영적 생각」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은 더 이상 가정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에 방향을 제시해 주는 개인적 말씀이 된다… 기대는 앞에 놓여 있는 뭔가에 대한 소망이며, 그것은 믿음을 갖는 것에 가깝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분이 행하실 것이라는 바로 그 사실(실상)이다.
우리는 변화되어야 하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에 순종하여 정결하게 할 수 있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정결하게 할 수는 없다.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새 가죽 부대가 새롭게 단장되었고 생각하고 반응하는 새 방식을 배울 채비가 되었다. 그리고 준비는 새로운 행동을 배우는 데까지 확장될 수 있다.
저주를 복된 생각으로 바꾸어라. 이 대체 요법이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생각을 훈련시킬 것이다.
---「7장 마음 훈련하기」중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새로운 정체성을 수립하고 싶어 하신다. 옛 언약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은총을 얻으려고 의식이나 의무만 행했다. 새 언약을 통해 예수님은 아담의 타락이 야기한 그 틈에 다리를 놓으셨다. 하나님은 아들을 주셔서 인류와 맺기 원하신 새로운 관계를 계시하셨다. 그분은 천사나 주님의 사자를 보내지 않고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종이나 어떤 다른 주체가 아니라 아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8장 아들처럼 생각하기」중에서
하나 됨이란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동의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일에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하나 됨은 아닐 수 있다. 하나 됨이란 획일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알아가는 것이고, 그분과 합주하며 움직여 가는 것이다.
---「10장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중에서
성령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실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최선을 이끌어 내신다. 최선은 우리가 창조된 그 궁극적 목적이라는 뜻이다.
문제가 우리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믿음은 한계까지 나아가게 하는 고난의 때로부터 계발된다.
---「12장 최선을 이끌어 내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