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체성이든 아니면 생활양식이든, 보다 심각하게 말해, 미셸 푸코 같은 학자들이 말하는 자아의 미학(aesthetics of the self), 재귀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이란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앤서니 기든스 같은 학자가 내놓은 “조형적 자아(plastic self)”이든, 모두 자신의 삶을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다루며 자신을 조형하고 계발하는 개인들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속한 계급적 배경이나 민족적 정체성을 통해 경험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사라진 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 어디에서나 부의 사회적 분배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생존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을 가로막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존재하고 또한 위력을 발휘하여 왔다. 그렇지만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통해 이뤄지는 다양한 사회적 협약과 제도화된 갈등은 또한 그런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무도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취업을 위해 스스로 “5종 패키지”를 마련해야 하며, 자기 “몸값”은 자기가 관리하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p.11
우리는 디자이너만 있을 뿐 정작 디자이너가 자신의 행위에 관해서는 어떤 유력한 담론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에 곤혹스러워진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영웅으로 예찬받지만, 이는 디자이너로 하여금 디자인에 관한 어떤 담론적인 통제도 못하게 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즉 브랜드처럼 디자이너만 있지 디자인을 둘러싼 사회적 실천을 전적으로 새로운 경제적 담론이 조정?매개하는 현실을 돌파하기 위하여 ‘디자이너 없는 디자인’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괜찮은 대안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디자인이 사라지고 디자이너만 있는 현상이 디자인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회적 장 내부의 자기충족적인 논리로부터 비롯된 결과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성의 회로에서 파생된 한 종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 없는 디자인을 생각할 수 있으려면 개인을 주체화하는 논리,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개인화하면서 동시에 전체화하는, 즉 각자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그 사회에 적합하고 유용하며 참된 보편적 인물로 우리를 불러들이고 조형하는 그 정치적 합리성(political rationality)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디자이너를 없앤 디자인을 생각한다고 해서 디자인이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소박한 생각일 뿐이다. 디자이너의 모습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외양을 달리 하며 사회적 삶의 모든 공간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사라져야 한다. --- pp.14-15
자신의 인생을 디자인한다는 믿음 속에서 경력을 개발하고 고용기회를 높이기 위하여 애쓰는 실업자에서부터 자기존중감을 가지고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리더십을 개발하는 여성, 자신을 학교사회가 만들어낸 획일적인 학생이란 정체성으로부터 해방시켜 능동적으로 자기주도성을 발휘하는 학습자 혹은 요즘 부쩍 성행하는 용어인 ‘학습권을 가진 개인’ 등은 모두 디자이너만 남은 디자인을 힐난할 때의 그 디자이너의 복제이자 반복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주체를 복제하는 주체성의 모델 자체를 바꾸지 않은 채 디자이너만을 폐지한다고 해서 디자이너 없는 디자인이 마련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디자이너와 등가적인 관계에 있는 모든 것, 즉 다른 개인들의 모습 역시 다른 인물들의 형상으로 바뀌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을 등가等價화하는 논리, 즉 신자유주의적 주체성의 모델을 상대해야 한다. 이것이 전체적으로 변환되지 않는 한 디자이너 없는 디자인만으로는 다른 모습을 한 디자인 주체를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이를테면 브랜드와 명성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닌 기업, 포트폴리오를 제시하고 연봉을 통해 임금을 지급받지 않는 노동자, 수월성excellence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지 않는 학생, 노동연계복지workfare가 아닌 새로운 복지의 모델을 상상할 수 있는 시민 등. 그런 주체들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를 변화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의 모델을 생산하고 규율하는 자본주의가 건재하는 한 어떤 새로운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모델도 등장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 pp.15-16
지금 흉측한 모습으로 도착하는 디자인을 향해 개탄하고 저주를 퍼붓는 것은 손쉬운 일일지 모른다. 혹은 그런 ‘타락한’ 디자인을 바로잡기 위해 공공디자인이니 하는 것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 역시 매우 편리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혹은 ‘지속가능한 디자인’쳀니 하는 디자인 담론을 내세우며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을 떠맡겠다고 자처하고 이를 통해 디자인이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와 맺은 뜨거운 연분을 반성할 수도 있지만 이는 권력과 제도에 대한 도덕주의적 비판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 pp.22-23
공공디자인이나 지속가능디자인이 현재 디자인이 초래하는 폐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현재의 경제적 질서와 규칙 안에서의 변화를 상상할 뿐이다. 즉 그것은 변화를 향해 무언가 자신은 하고 있다는 허울을 계속 만들어내면서 사실은 아무런 변화도 불가능하다는 그래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나쁜 파국보다는 낫다는 믿음을 유지하려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현재의 디자인을 향한 이유 있고 또 정당하기까지 한 불만이 충분치도 않고 또 석연찮은 것이다. 그런 논의는 무엇보다 현재의 디자인의 모습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요인을 검토하지 않는다. 그런 요인들은 디자인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외부로 치부되고 말아버린다. 다시 말해 디자인은 마치 다른 외부의 영역으로부터 격리된 혹은 면역된 자기충족적인 세계인 것처럼 가정된다. 그러나 디자인의 외부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디자인과 그 바깥의 영역을 접합하는 것, 다시 말해 디자인을 규정하고 재현하는 논리와 디자인 외부의 세계 역시 똑같이 규정하고 재현하는 논리 사이에 교환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 그 어떤 상위의 차원이 무엇인지 추적하고 검토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화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 p.24
물론 그 10년은 신경제란 이름의 자본주의, OECD 소속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지식기반 경제’란 이름이 붙은 자본주의와 디자인이 완벽하리 만치 공생하였던 세월이다. 이는 한편 디자인 잡지와 라이프스타일 잡지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상품의 카탈로그를 훑어보는 것을 좋은 디자인을 느긋이 감상하는 쾌락으로 바꿔낸 『월페이퍼』의 출중한 능력이 펼쳐진 세월이기도 하다. --- p.47
그렇다면 결국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규칙이 가능하고 유일한 것이며, 한 고약한 보수주의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이상 다른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역사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처지에 디자인이 정치와 어떤 인연이 있을 것이라는 극한적인 생각은 처음부터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설령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다고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것은 디자인의 외부에서 가능한 일일 뿐일까. 그래서 자본주의가 유일하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약자를 위하고 보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하며 생태적인 디자인 등등에 충실하면서, 세계가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아름다운 그러나 수척한 희망을 지피며 살아가는 것뿐일까.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법칙인 지구화와 20 대 80의 사회의 논리가 불가항력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비정규직을 폐지하라는 식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거나 금융세계화를 중단하라는 미치광이 같은 주장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공정무역’을 위해 애쓰고 ‘마이크로 크레디트’ 같은 작지만 보람 있는 일들에 헌신해야 하는 것일까. 알다시피 거기에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줄 저렴하고 실용적이며 자원 적합적인 컴퓨터를 디자인하는 일들이 디자이너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역 원주민의 토착적인 생활양식이 스민 공예 기법과 선진국 소비자의 취향을 결합하여 미국과 유럽 대도시에서도 잘 팔릴 수 있는 공정무역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 교육 같은 것이 디자이너들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나 “민중을 위한 디자인” 따위의 시대착오적이고 정신병적인 바우하우스식 슬로건은 잊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 pp.33-34
그렇다면 정치와 디자인의 관계를 달리 궁리하고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결정적인 질문일 것이다. 그것이 먼저 정치가 살아난 다음에야 문화와 예술이, 나아가 디자인이 살아날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져선 안 될 것이다. 다시 총체화되고 폐쇄된 사회, 지구적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명령에 의해 규정된 사회가 아닌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문화와 예술에 의해 매개될 것이고, 디자인 역시 그런 매개자의 위치에 자리할 것이다. --- p.42
어쨌거나 디자인은 비록 더없이 반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상상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문학이니 미술이니 하는 본격 예술이 우리에게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할지 말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 몰라도 놀랍게도 디자인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점은 지금 여기 자본주의에서의 삶을 상상력을 통해 심미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이 모두 곧 자본의 능력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전적으로 반정치적인 정치를 위하여 동원된 상상력을 가리킨다. --- p.43
디자인된 모든 것, 혹은 근대 디자인을 창립한 영웅들이 꿈꾸었던 ‘토털 디자인’의 세계가 결국 『월페이퍼』를 통해 실현되었다! 나아가 그것은 모두 점검받고 평가되었으며 마침내 순위까지 얻게 되었다. 어쩌다 순위 선정이 우리시대에 가장 유행하는 강박적인 이야기 방식이 되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의무라는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부과한 명령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믿을 만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 p.49
『월페이퍼』는 지난 10년의 역사를 연대기화한다. 그 연대기는 “양 돌리의 인공복제 성공”에서 “아이팟의 탄생”을 거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승하”로 이어지고 그 사건들은 유수의 디자인 명품들의 콜라주를 통해 서술된다. 사실 지난 10년 동안 역사는 없었던 것이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는 뉴스와 유행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우리에겐 역사를 대체한 물건들의 유행이 있었으며, 디자인은 역사와 완벽히 두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월페이퍼』는 디자인의 죽음을 위하여 그토록 분투했던 것이다. 또는 모던 디자인의 명예를 걸고 모던 디자인을 완전무결하게 교살했던 것이다. 그렇게 디자인은 반역사적인 망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된 것이다. --- p.54
결국 좋은 건강, 보다 많은 생명을 위한 욕망은 또한 소비자본주의가 자신을 추동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명의 문화를 빌려 동시대의 소비문화를 향해 규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심지어 퇴폐적이기조차 하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고 아름답다는 구호 아래 인간을 동물 혹은 모든 생물과 동일한 차원에 놓아버리는 것, 인간이 오랫동안 투쟁해온 자유라는 것이 자신을 지배하는 맹목적인 자연적 운명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임을 부정하는 그 몽매함이 유일한 문제인 것은 아니다. --- p.131
문화방해운동가는 허위적인 로고의 가치로부터 진정한 상품의 가치, 우리의 진정한 삶의 가치를 탈환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설적이지만 거꾸로 진정한 물신주의자의 모습을 취한다. 그들은 로고가 붙지 않은 소박한 운동화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소비할 수 있는 삶을 상상함으로써 운동화를 물신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물론 이는 숱한 사이비 생태주의자들과 다문화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오류이기도 하다.)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