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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되는 꿈

고래가 되는 꿈

문예중앙 시선-047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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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1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234g | 125*204*13mm
ISBN13 9788927808060
ISBN10 892780806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신동옥
1977년 남양에서 태어났다. 2001년 『시와반시』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가, 산문집으로 문학일기 『서정적 게으름』이 있다. 윤동주문학상 젊은 작가상과 노작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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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내가 온 힘으로 달려서
이 땅 끝까지 달려서 어느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순간
나는 끝없이 달릴 수 있고 절벽으로 몸을 날리거나
가만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기는 수도 있겠지.
여기 잠들어야 하나?
마저 헤엄쳐 건너야 하나?
내가 처음 마주한 벽을 무너뜨리고 처음 움켜쥔
문고리는 뜨겁게 달아올라 쥘 수도
놓아버릴 수도 없는, 여기
잠들어야 하나? 그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물가에는 언제나 하얀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얼빠진 사내가 있어 저 치명적인
인간의 꿈에 중독된 물빛에 비추자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그리워하는 自然 또는
처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내
또는 처음 노래를 지어 부른 여인
그 속이 타들어가는 열정을
헤아려보자

민물에서 짠물로
솟구치는 기포의 힘으로
물보라를 꽃처럼 틔워내며
서서히 항진하는 몸부림을 귀청을 찢는
폭발음을 일으키며 등성이에서 등성이로
절벽에서 절벽으로 쏟아져 내리는 아우성을
가령 내가 온 힘으로 달려서 이 땅 끝까지 달리고 달려서
처음부터 다시 진화하는 법을 배워서
숨을 들이켜는 법부터
다시 익혀서

물속 깊이 주둥이는
길게 늘어뜨리고 목구멍으로는
공기를 욱여넣으며 마침내 울음도
웃음도 하얗게 말라붙는 진공으로, 더불어
꺼멓게 타들어간 등허리는 파도 위에 내어놓고
숨구멍은 고단한 이마 위에 옮아 붙어서
무릎에서 발등까지 한데 뭉친
꼬리지느러미로 쿵, 쿵,
수면을 내리찍으며
물길을 틀 때

미끈한 물결 따라 옴폭 팬
물구덩이 봐라, 마법처럼 피어났다
오므라드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헐거운 심박동으로 옴폭 팬, 무덤을 닮은
물구덩이를 고래발자국이라 부를까?
가령 내가 저 멀고 춥고 아득한 물길 따라
꽃잎처럼 너울너울
피었다간 메워지는
고래발자국 몇 땀으로

이 땅을 버리고
맨 처음 바다로 나아간
한 마리 고래가 되어서
내 남은 숨 모두 들이켜고도
차고 넘칠 퀴퀴한 추억에 익사하던 어느 먼 옛날
전생의 힘을 빌어서도 끝장내지 못한 미련은
나도 모를 누구의 꿈결을 텀벙거리며
치달리고 달릴까?

저 잔잔한 수면을 헤치고
가라앉는 별 몇 알 물먹은 빛으로
뿜어 올리는 커다란 울음으로
탕, 탕, 탕,
항진하는 고래발자국 속에서
맨 처음 물속에 뛰어든 파동이 되어서
맥박이 되어서 노래가 되어서
마침내 내가
고래가 되어서
끝없이 끝도 없이.
---「고래가 되는 꿈」 전문

지구는 악마투성인데 우화에는 늘 천사가 없지.

가령, 홍적세 만 년 고사리 숲속 작은 집
안녕! 한마디 말로 꽃 피우는 아이들
새를 불러 모으고 가지를 늘어뜨린다.

누군가 꿈꾸고 누군가 꽃잎을 들치고
누군가 식탁을 두드리며 노랠 흥얼거리는 저녁나절.

나른해! 누군가 말하면
모두 눈썹 위에 설탕을 뿌리고 다디단 잠을 잔다.

식탁에는 호리병.
흔들의자 위에는 사탕 그릇.
사탕 그릇 속에 꽝꽝 얼어붙은 설탕 시럽.

녹아 허물어져가는 벽 틈,
연유를 칠한 크래커 처마 아래 막대 사탕 굴뚝.
초콜릿으로 빚은 문고리는 집을 드나드는 이의 떡니라도 되는 듯 반짝인다.

설탕 시럽에 발을 담갔다가는 잽싸게 창문을 빠져나가는 개똥지빠귀.
호리병 속에서 시간이 조금씩 잦아든다.

기다리는 손님이라고는 고개를 조아리고
발바닥에 묻혀온 길을 터는 공손한 뒤꿈치들.

가령, 아이였음을 기억하는 아이들밖에 없는
아이들이 지은 집.

사탕은 여전히 단단하고
아이들은 시럽 속으로 가만히 녹아든다.
---「라퐁텐의 천사들」 전문

1월, 왕은 마시던 술을 엎지르고 잔에 낀 살얼음을 걷어 흩뿌린다. 얼어붙은 물줄기는 얼어붙은 강으로 얼어붙은 바다로 이어진다. 2월, 성은 전쟁에 휩싸인다. 녹슨 화살촉을 한 움큼씩 꺼내어 화폐를 대신하는 삶. 백성들은 얼음수레에 꽃 장식을 한다. 짓무른 아이의 무릎에 화약을 바르고 길을 재촉한다. 간헐적인 소낙눈이 멎자 3월이다. 붕대를 온몸에 두른 아이들이 물살에 떠밀려 온다. 왕은 평화를 선포한다. 성은 거대한 화관(花冠)으로 돌변한다.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쩌면 삶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주검을 얼음에 묻겠지.

4월, 긴 긴 기근이 시작된다. 세상 모든 나무들은 관짝이 되기를 바라는 듯 잎을 되삼킨다. 그런 바람에 맞춤하게 세상 모든 꽃나비는 수의를 꿈꾼다. 5월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백성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왕에게 묻는다. 언제 다시 평화가 오나요? 백성들은 왕 역시 그들보다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왕은 어딘가로 끝없이 뻗은 깊고 아득한 참호에 누워본다. 7월, 왕은 메마른 성벽이 태양 아래 쩍 쩍 갈라지는 모양을 말없이 지켜본다. 꽃 덤불 사이로 달빛이 실보무라지를 흩뿌린다.

8월 보름, 왕은 백성들을 한 줄로 세우고 야윈 손가락으로 동그란 빵을 나눈다. 한없이 잘게 부서진 빵가루들이 성문으로 이어진 길을 덮는다. 9월이다. 빵가루 위로 이른 낙엽이 쌓이고 갈라진 대지에 이슬이 고인다. 이대로 낙엽이 쌓여 젖으면 적들의 수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겠지. 10월에는 가을볕 짙푸른 단풍 속에서 새로운 주검들이 오래된 주검 위로 포개진다. 성에서 태어난 자를 성 밖에 묻는 오랜 풍습처럼 먼 곳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배꼽 위에 얹고 손끝에서 발가락까지 끈을 동여맨 염습의 나날. 11월이 가고 왕은 열없이, 세상 모든 길로 뿔뿔이 흩어지는 백성들을 향해 마른 꽃을 던진다.

세상 모든 길에 처음 이름을 붙인 자는 누굴까? 12월, 얼어붙은 성은 얼어붙은 바닷길로 서서히 흘러간다. 왕은 마른세수로 검은 피를 덥힌다. 피가 식기 전에 관절을 당겨 동여맨 손가락에서 발가락까지 팽팽하게 벼리던 온기로 만나는 길들. 조난자들의 마지막 무덤. 얼음수레. 한 마리 얼음물고기. 발간 지느러미 사이로 얼어붙은 비늘이 버려진 지도처럼 빛난다. 물속 깊은 데서 티 없는 손바닥 하나 맑게 떠오른다. 갈라진 성벽을 차오르는 물은 거울처럼 투명하다. 끝내 얼어붙을 물줄기는 얼어붙은 물길로 얼음물고기 눈동자로 이어진다. 파란 유빙을 헤치는 성 망루에 앉아서 왕은 되묻는다. 언제 다시 평화가 돌아오나요?
---「쇄빙성(碎氷城)-비트 17」 전문

비와 초승달처럼
바람과 칼날처럼
비워져가는 사람은
기도하는 손아귀처럼 등이 굽었다.

돌멩이로 누를 수 없고
책갈피를 끼워 넣을 수 없는 빈자리 끝에서
눕고 서고 기고 꺾이고 잘리고 닫히고 흩어지는
삶의 도화선

그 타들어가는 모양을 개미 걸음으로 따라가는 일
그 끝없는 이야기의 바깥에 필터를 꽂아 숨구멍을 틔우는 일

그는 태어나면서 한번 울고 살아가며 눈감고
마지막으로 한번 웃으리라.
웃음은
타들어간 종이처럼 묘비명을 쓰겠지.

억새와 대나무가 우거진 옛 수풀을 지나면
먹줄로 그어놓은 선처럼 반듯한 담장 아래
샘물에는 무너진 종탑이 비치고

수면 아래는 만질만질한
돌멩이 그가 발견한
투명한 어휘들 속에서
그는 살아 있고 살게 되리라.

향료와 시든 꽃다발 대신
증류수 한 잔이
잉크를 대신하겠지.

늘어진 그림자를 끌고 선 마을
담벼락과
장미 넝쿨 사이로
경전을 새기는 철침 같은 비가 내린다.
아득한 구약 향기의 빗줄기 사이로
눈먼 여백 제도사가 걸어가고 있다.
---「시인-비트 23」 전문

아름다운 시를 얻은 밤에는 울음도 없이 흐느끼는 꿈을 꾸었다. 먼 곳에서 문장을 좇아 말을 달려온 이 하나, 인적이 드문 꿈의 빗장을 밀다가는 두드렸다. 그는 빗장을 풀고 어스레한 바다를 만난다. 비단 물결 위로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어디선가 피리 소리 잦아든다. 새는 물가 가지 위에 잠들고 달은 낮 동안 빌려 온 빛살을 되쏘며 빛나고. 그는 서울에서 온 韓이라고 다짜고짜 어제의 시 좀 볼 수 없느냐고. 소매 춤에서 붉은붓을 꺼낸 그는 무언가 못마땅하단 듯 글자를 한 획 두 획 지워나갔다. 붓끝이 스칠 때마다 달빛은 구름을 뿌리째 뒤흔든다. 가도(賈島, 779~843)는 사라져가는 문장을 헤아렸다. 손가락을 꼽으며 마음으로만 하나 둘 다시 하나 하나……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종잇장을 내려다보다 멀리멀리 날아 물살에 깃을 친다. 물결은 꿈이 깨도록 밀고 밀리고 알 수 없는 무늬를 그리며 잠든 시인의 눈꺼풀을 두드린다.
---「퇴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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