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경제학은 왜 모든 경험적 사실과 상반되는 자유 시장을 끈질기게 선전하는 것일까? 국민은 왜 일상적인 시장 거래와 모순되는 주류 경제학의 선전을 믿는 것일까? 칠면조도 도축업자 앞에서 꽥꽥 우는데, 소비자들은 왜 저항하지 못하고 ‘수요와 공급의 철칙’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일까? 시장 옹호 선전의 첫 번째 과제는 사람들이 자기 시장 경험을 스스로 평가할 능력이 없다고 세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시장이 ‘좋은 것’이라고 합의한 상황에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만장일치 성립을 위해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일탈자로, 심지어 자유 이념의 반역자로 취급한다. 그들은 시장이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제거하는 ‘제거 절차’를 거쳐 시장이 좋은 것임을 증명한다. 이처럼 실제 경험과 모순된다고 해도 시장이 완벽하다는 결론만을 남긴다. --- p.39
은행은 예금자의 돈으로 고객에게 대출해주고 이자를 받는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돈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는 활동에 대단한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는 듯싶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금융업자가 돈을 ‘번다(earn)’고 표현하지 않는다. ‘번다’라는 단어는 생산적 활동을 가리키는데, 금융은 경제활동에 꼭 필요할지는 몰라도 생산적이지는 않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든 혹독한 추위 속에서든 온종일 일하는 미화원은 돈을 ‘번다’.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숫자를 옮기는 금융업자가 돈을 번다고 표현한다면, 그 표현은 본래의 긍정적인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 p.91
1941년 1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미국 의회에서 한때 유명했던 ‘네 가지 자유’ 연설을 통해 이 사실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국민이 정치와 경제 체제에 기대하는 기본적인 사항은 간단합니다.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모든 사람에게, 특히 젊은이에게 기회의 평등을, 사회적 약자에게 사회보장제도를 제공하고, 소수의 특권을 철폐하고, 모든 시민의 자유를 보전하고, 생활수준이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가운데 과학 발전의 성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 p.102
카를 마르크스의 이름은 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가짜 경제학자에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어두운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수요와 공급’ 법칙을 찬양하는 자들의 허위성을 따끔하게 지적했다. 내가 ‘가짜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켜 “천박한 경제”라고 비판한 마르크스는 그것이 “현학적 방식으로 체계화하고, 자아도취적 부르주아지가 모든 세상 중에서 최고인 그들의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상투적인 관념들을 영원한 진실로 선포했을 뿐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부르주아지”를 ‘상위 1%’로 대체할 수 있다. 가짜 경제학은 지난 150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 p.133
만약 내가 길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삶의 질을 개선하고 싶은지를 묻는다면, 거의 모두 ‘예’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런 개선의 희망을 사고팔 수 있는 상품에 대한 무한한 욕구와 동일시하거나 그것으로 환원한다면, 사소한 문제를 인간 본성의 진실로 과장·확대하는 셈이다. 대부분 선진국 빈곤층 비율은 충격적으로 높다. 그들의 욕구가 무한한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고 반동적인 추측이다. 빈곤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품위 있는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상품을 구매할 소득이 없거나 소득을 얻을 수단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를 바꾸려는 욕구는 전혀 놀랍지 않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욕구가 인간의 소비 행태에 관한 보편적 진실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지성인은 없다. 최상위 소득계층의 가계에는 정반대의 문제가 있다. 긴축 정책이 빈곤층을 지배하는 반면, 부유층은 과소비를 지침으로 삼는다. 대체 어떻게 1년 동안 130만 달러(미국 상위 1%의 평균지출액)나 100만 달러(영국 상위 1%의 평균지출액)를 쓸 수 있을까? 우리는 12월 31일이 되어도 통장에 잔고가 아직 남았을 때 상위 1%가 느끼는 ‘불안’을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 p.141
개인을 소비자로 취급하고 소비에 개인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설득하는 태도는 의미심장한 정치적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사회 교류의 모든 측면에서 상품의 수사학이 일반화한다. 철도와 항공기 승객은 허구의 상품인 ‘수송’의 소비자가 된다. 대학생은 수업을 들으며 지식의 소비자가 아니라 학위 소비자가 된다. 의료서비스를 소비할 목적으로 의사를 찾아간다. 이럴 때 ‘소비’라는 단어는 불쾌하고 부정확한 수준을 넘어서 사악하다. 동료 시민을 ‘소비자’라고 부를 때 우리는 결국 사물과 맺고 있는 것과 유사한 관계를 그와 맺게 된다. 항공사 근무복을 입은 사람, 교탁 뒤에 서 있는 사람,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은 우리 동료 근로자나 시민사회 참여자가 아니라 주문 받은 상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단일 뿐이다. --- p.171
무역 논쟁의 배경에는 ‘가난한’ 국가들이 ‘부유한’ 국가의 보호 철폐로 혜택을 본다는 그린피스 식 주장이 깔렸다. 그러나 지극히 가난한 국가들은 선진국의 농산물에 대한 보호를 철폐함으로써 이익을 볼 정도의 규모로 생산하지 못한다. 그린피스, 옥스팸 등 단체는 이 문제를 착각하고 있긴 하지만, 무역 규제 완화가 극빈국을 도울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규제 완화를 지지한다. 가짜 경제학자들은 보통 시민의 심금을 울리며 노골적으로 빈곤층의 이익에 반하는 강대국의 무역정책을 허용하는 이런 결정에 악어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자(케임브리지에 넘쳐나는 가짜 경제학자가 아닌) 장하준은 저소득 국가 국민을 위해 정부가 국제무역의 ‘레세페르’ 원칙(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버려 두라’가 아니라 ‘내버려 두지 말라’ 원칙 또는 구매자 위험부담 원칙)에 모든 것을 맡기지 말고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합리적으로 주장한다. --- p.185
공공부문은 대학교육을 지원하는 적정선을 어떻게 결정하고 어느 수준까지 부담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없다. 사람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런 극단적 입장을 표명하는 대신에 ‘감당 능력’이라는 가면을 쓴다. “저도 우리가 모든 젊은이에게 대학교육을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대학교육을 받고 나면 개인적으로 이익을 보니까, 각자가 비용을 부담해야 합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빈곤층을 돕는 정도일 뿐입니다. 만약 당신이 가난해도 똑똑하면 장학금을 받으면 되겠지요.”
우리는 이런 주장이 흔히 ‘기회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유포되는 현상을 목격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날 뿐이다. 부자는 바보라도 학위를 받을 수 있지만, 빈자는 ‘똑똑해야 한다’는 자격이 필요하다. 이런 식의 접근은 하버드 대학에 바보 부자들이 왜 그렇게 많고, 아칸소의 산간벽지나 뉴욕의 흑인 빈민가에서 온 바보 학생은 왜 상대적으로 적은지를 설명해준다. 대학교육 감당 능력을 거론하는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대학교육을 받을 권리가 없다. 대학교육을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용을 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가난하고 똑똑하다면 대학에 갈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부유하고 바보라면 무조건 대학에 갈 수 있다.”
감당 능력의 오류를 유포하는 자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품위를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다. 사람들은 시장화된 자연 상태에서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고립된 개인, 세금을 내는 소비자의 느슨한 집단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다시 홉스를 인용하자면, 사회 계약이 없는 자연 상태에서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고약하고 야만적이고 짧다”. 이는 현재 상위 1%가 나머지 99%를 위해 준비해둔 삶이다. --- p.204
오늘날처럼 정치가 지극히 보수화하고 반동적인 행태를 보이는 시대에 대다수 정치인과 언론은 정부가 균형 있는 예산을 유지하고, 부채를 축적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너무도 당연한 진실로 믿는다. 균형예산이 바람직하거나 꼭 필요하다는 정당한 경제적·회계적 근거조차 없지만, 그들은 ‘긴축’이라는 명목으로 지독하게 반사회적인 정책들을 정당화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이 부패한 이념의 힘은 정치적으로 제멋대로 주무를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국가 의료보험이나 사회보장연금도 얼마든지 삭감할 수 있다고 국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 p.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