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두려웠던 30세 생일. 그러나 정작 그날이 되었을 땐 평소 상상했던 것만큼 속상하지 않았다. 생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 즉 내 패션 인생에 기념비가 될 만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구두 100켤레의 주인이 되었다. 그 후로 세월이 흘러 이제 44세. 나는 30세 때 가진 것의 절반밖에 안 되는 구두를 10평이 채 못 되는 주거공간에 억지로 밀어 넣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이 모든 게 팀 때문이다.
그가 개조 버스를 타고 1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지 모를 이 난해한 계획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항을 고려해 보았다.
“도대체 당신은 평범한 남편들처럼 속 썩일 순 없는 거야? 중년의 위기를 겪는다거나, 바람을 피운다거나, 콜벳을 산다거나, 차라리 그런 사고를 치는 게 낫겠어.” 여기에 덧붙여, 나는 강력하게 단언했다. “나는 절대로,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죽었다 깨어나도 버스에서 살지는 않을 거야.” ---p.13
“저기…… 저건…….” 그는 버스의 종류를 기억해 내려고 머리를 굴리느라 말까지 더듬었다. 물론 나는 다른 버스의 종류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저 남편이 운전에 집중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여보, 저건 버스야.” 나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차분하게 일러 주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팀이 물었다. 그가 나의 소중한 펜디 클러치를 핸드백이라고 불렀을 때의 내 반응만큼이나 공격적인 어투였다.
“무슨 뜻이냐면, 아니 도대체 누가 버스의 종류 따위에 관심을 갖겠어?” 나는 앙칼지게 되물었다. ‘제발 운전에만 집중해 줘’라는 의도를 가득 담아서.
“‘9월의 버스 아가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를 꾸짖었다. “게다가 당신이 주인공인 달이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맞다, 9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버스여행은 곧 끝날지 모르겠어, 여보. ---p.134
간혹 내가 버스 밖으로 나올 경우, 어김없이 팀이 이미 만나서 알게 된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알고 보니 팀은 내 이름을 도린 ‘오리온’이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그의 성인 ‘저스티스’와 다르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의 ‘여성주의적 신념’을 존중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팀, 내가 왜 결혼한 다음에도 성을 안 바꿨는지 알아?” 내가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모르겠는데.”
“그냥 죽도록 귀찮아서 그랬어. 운전면허증, 주민등록증 등 온갖 신분증에 이름을 바꿔야 되잖아. 사람들이 날 도린 ‘저스티스’로 불러도 괜찮거든?”
“허허, 그걸 몰랐네.”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가 날 사람들에게 소개해 준 것 자체를 후회할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가령 대화가 길어지다가 “뭘로 먹고살아요?”라는 주제가 떠오를 때라든가. 우리가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열에 아홉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로선 금시초문인 질문이라,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럼, 지금껏 내내 제 심리를 분석하고 있었겠네요?” 팀이 움찔하면서 슬슬 도망칠 작정을 할 때가 바로 이 시점이다. 앞으로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잘 알기에.
“왜요?” 내가 부드럽게 반문한다. “만약 제가 항문외과 의사라면, 댁 엉덩이를 들여다보고 싶어 할 것 같나요?” ---p.158
내 걱정은 모두 기우였다. 누드 캠프장에선 말 그대로 모든 게 누드였다. 근육질 사나이도, 잰 체하는 허풍선이도, 폼 잡는 꼴불견도 없었다. 다들 보란 듯이 은밀한 부위까지 내놓고 다녔다.
누드 리조트는 사실 우리가 겪은 곳 중 가장 편한 캠프장이었다. 게다가 이용료가 퍽 저렴했다. 어차피 선크림에 들어간 돈까지 합치면 그게 그거였지만. 1952년 생긴 올리브델 랜치는 2세대에 걸쳐 어느 일가의 소유로 운영되었고, 분위기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현재 주인인 바비와 베키 부부는 각각 나체주의 가정에서 자라 결혼했고, 이제 그들의 아이들이 이 캠프장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부부도 남편이 앞치마 하나만 달랑 걸치고 요리를 했는데, 바비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참치 샐러드 조리법을 나에게 전수했다. 지구상 모든 곳이 그렇듯이, 이 캠프장에는 묘한 특징이 있었다. 가령 어떤 여자는 도무지 수다를 멈출 수 없다며, “잠깐 숨 좀 돌릴게요. 방금 차돌박이 스테이크를 먹었거든요”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신기한 사람은 캠프장 관리인이었다. 그는 홀딱 벗은 몸에 공구벨트만 허리에 차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공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방향을 틀면 착시효과가 생겼다. “저기요! 떨어질 것 같아요, 그…….” 어머, 공구가 아니었네.
안 그래도 명품에 대한 집착에서 서서히 ?어나는 중이었는데, 이곳에서 ‘속살까지 드러내고’ 지내면서 한층 더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이런 생활은 애초에 팀이 버스여행을 하기로 한 이유를 새삼 되새기게 해주었다. 그렇다, 우리 부부는 팀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실천하고자 길 위로 나섰다. 모든 걸 훌훌 벗어 던지는 이곳에서, 마침내 팀은 여러 가지 다른 걱정거리마저 시원스레 벗어 던진 듯했다. ---p.277
짐을 푸는 데 몇 주가 걸렸다. 분명 하루에 다 해치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마치 항구에 있는 컨테이너를 매달고 있는 거랑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한 해를 붙들고 있었다. 우선 나는, 여행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으며, 얼마나 많은 것 없이 여행을 마쳤는지 깨닫고 적잖이 놀랐다. 버스 침실 전체만 한 크기의 벽장 안에 들어가 있는 날 보면서, 팀이 중얼거렸다. “신발을 저렇게 많이 가져갔어……?” 내가 1년 내내 신은 신발은 총 여섯 켤레에 불과했다. 스니커즈 아니면 하이킹용 운동화. 심지어 팀의 짐 속에서 내 물건이 속속 나왔다. 도대체 그 물건들을 어떻게 버스 안에 다 쑤셔 넣었는지 모르겠다. 집에서는 어디에 넣어야 할지 헤매는 마당에. 마침내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팀에게 애원했다. “이제 내 것을 찾더라도 아무 말 말아 줘. 그냥 자선단체에 보내.”
“잘 생각했어.” 다른 상자 위로 몸을 구부리며 그가 대답했다. 다음 순간,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와 박혔다. “리처드 타일러가 누구지?” 나는 괴성을 지르며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재킷을 홱 낚아챘다.
그 후 몇 개월간, 나는 꽤 많은 물건을 버렸고(리처드 타일러 재킷은 빼고) 새로 사들이지 않았다. 이는 정말 대단한 변화였다. 우리가 없는 사이 볼더에 새끈한 쇼핑거리가 들어선 악조건을 딛고 말이다. 메이시스 백화점도 있다고 들었다. 진위 여부는 모른다. 나는 안 가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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