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심판이 ‘시작’을 외치자마자 ‘홍’이 먼저 바른 주먹을 이용한 손 기술을 시도했지만 ‘청’의 보호구를 비껴가면서 선제공격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도 이에 질세라 가장 큰 점수를 딸 수 있는 돌려차기로 홍의 얼굴을 가격하려 했지만 홍은 가볍게 피하며 청을 경계했다.
청색 헤드기어를 쓰고 청색 호구를 착용한 여자가 자청비였다.
오호, 나를 한 방에 보내시겠다 이거지? --- p.8
무조건 이겨야 한다!
“김 자청비, 파이팅!”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다 불러주는 사람은 단 한 명. 관람석에서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 가득한 남자의 음성에 청비는 반가움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성은 김, 이름은 자청비. 그래서 부르기 힘들어 보통 ‘청비’라고 불렸는데 유독 아빠만은 항상 저렇게 긴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 p.8~9
청비는 홀린 듯이 남자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 들리는 클랙슨 소리에 청비가 놀라 걸음을 멈추었고 곧이어 헤드라이트 불빛이 시야를 덮쳤다. 동시에 큰 충격이 몸에 전해지면서 청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 며칠,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들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병원의 소독약 냄새, 절규 어린 아빠의 목소리, 그리고…… 물소리였다. --- p.10
풍정전을 나온 단휘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어찌 꺼야 하나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마음에도 없는 여인을 품어야 한다니, 이대로 가만히 후궁 간택을 지켜볼 순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단휘의 눈매가 어느 순간 날래게 빛을 내며 가늘어졌다.
그래, 여인. 여인이다. 당장 여인이 필요하다. 가짜라도 내세워 후궁을 대신할 만한 여인이. --- p.18
안개로 덮인 강 속에서 한 남자가 청비를 안은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인영이 물 밖으로 드러날수록 물안개도 완전히 걷히고 탁했던 강물도 순식간에 투명해져 속이 다 비칠 정도로 맑아져 있었다. 긴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 품에는 의식이 없는 청비가 안겨 있었다. 강물은 이제 남자의 발목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물 밖으로 나온 남자는 조심히 청비를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네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궁금하구나. --- p.19
여인은 풍기는 향기만큼이나 생김새도 신비로웠다. 검은 머리는 짙고 윤기가 흘렀으며 그냥 하얀 것만이 아니라 파란 핏줄이 비칠 만큼 투명할 정도로 피부가 희었다. 입고 있는 옷 역시 본 적이 없는 차림새였다.
이탄국 여인이 아니군. 다친 것 같진 않은데…….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혹여나 병을 앓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처음 보는 여인이었지만 류하는 마음이 쓰였다.
여인을 궁으로 데려가야겠어. --- p.21
“여인이다.”
여인? 단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럼 형님이 여인을 궁으로 데려왔다는 건가? 뭔가 복잡한데. 상황을 정리해보자. 류하 형님이 아이……가 아니라 여인, 그것도 처음 보는 여인을 데려……. 여인? 여인!
“여인이라 하셨습니까, 지금?”
단휘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도 잠시, 그는 무심히 지나쳤던 여인에게로 고개를 틀었다.
“찾았다.” --- p.23
“한……국……?”
“네. 대한민국 서울. 제가 사는 곳이요.”
“처음 들어보는 곳이군요.”
처음 들어본다고?
청비는 장난기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남자의 진지한 대답에 충격을 받았다.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몸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말도 안 돼. 지금 대한민국을…… 처음 들어본다고 했어요? 그럼 서울 몰라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요. 삼성도, 가수 싸이도, 김치, 불고기, 다 몰라요?” --- p.46
“저 역시 절대, 절대적으로 저 여인이 필요합니다, 폐하!”
자신 역시 여인이 필요하다며 류하 옆에 무릎을 꿇고 앉는 태자의 행동에 황제도, 지켜보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동요했다.
언제까지나 ‘독신(배우자가 없는 사람)’, ‘독거(혼자 삶)’, ‘독존(홀로 존재함)’으로 살 것이라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던 태자가 아니었던가. 지금껏 난다 하는 작위의 여식은 물론이고 타국의 공주와의 혼담도 다 거절해왔던 터라,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태자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 p.62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강물과 소택지였다. 모두 맑은 물로 정화가 되다니. 모두 청비가 그 자리에 있었고, 우연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단휘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졌다.
청비, 너에게 기이한 능력이라도 존재하는 것인가.
---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