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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침묵

바다의 침묵

[ 양장 ] 열린책들 세계문학-01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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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1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54쪽 | 312g | 128*188*20mm
ISBN13 9788932909073
ISBN10 8932909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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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거기서 벗어나게 될 거라고. 아! 내가 정확히 그 낱말들을 생각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거짓일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너무나 암울하리라 예견되는 눈앞의 시기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던 시대들, 그 끝없는 시기들을 떠올렸다고 말하는 것도. 살인과 약탈과 광적인 무지와 잔인함이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거의 천 년 동안,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횃불을 손에서 손으로 전하기 위해 몇몇 수도사들에게 필요했던 필사적인 용기와 초인적인 끈기를 떠올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물론 나는 그 모든 것을 정확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용을 훤히 꿰고 있는 책의 장정을 볼 때의 느낌과 흡사했다. --- p.20, 「절망은 죽었다」 중에서

「……몹시 외로울 때, 독일인들에겐 늘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늘 그랬어요. 주인으로 군림하는, 같은 당파의 남자들만 득실거릴 때, 그들보다 더 〈외로운〉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프랑스에 와 있으니까요. 프랑스가 그들을 치료해 줄 겁니다. 그리고 감히 말씀드리건대, 그들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그들에게 진정 위대하고 순수한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절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는 열린 문을 잡고 잠시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려 뜨개질을 하고 있는 조카딸의 목덜미, 땋아 올린 적갈색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가냘프고 창백한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하고 결연한 어조로 덧붙였다.「함께 나누는 사랑이.」 --- pp.53~54, 「바다의 침묵」 중에서

나이가 많이 들어 주름투성이인 뷔페랑 부인이 바삐 오는 그들을 보자마자 가슴에 손을 얹었다. 「오, 주여……!」
아빠가 말했다. 「예, 데려갔어요.」 둘은 들어갔다. 계피 향이 물씬 풍기는 작은 거실에 들어섰을 때, 아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양탄자 위에 드러누웠다.
아이는 어른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너무 깜깜해서 귀 기울여 들을 수가 없었다. 뷔페랑 부인이 갈라지는 작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뭐라고 말을 해댔다. 아이는 그 말이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아이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눈물을 삼켰다. 눈물 한 방울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아이는 혀로 그것을 날름 찍어 먹었다. --- pp.85~87, 「그날」 중에서

나에게 하나의 생각이, 하나의 감정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처럼 머리와 심장을 가진 많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비참한 삶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돈을 벌고 사랑을 나누고 식사를 하며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않은 채 매일 세상과 세월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 심지어 그런 사람들도, 가끔 우리를 생각하면서 야비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쓰라린 아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비통함, 차갑고 황량한 절망이었다. --- pp.105~106, 「꿈」 중에서

「그래, 잘 들여다봐. 그리고 인사를 올려. 입에 거품을 물고 그들에게 찬탄과 감사를 표해 봐! 자네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왜냐하면 자네는 그들 덕분에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인간이 되었으니까! 인간인 것에 너무나 만족하니까! [……] 이 모든 게 도대체 뭔가? 다름 아닌 개지랄! 구역질 나는 개지랄! 인간이란 게 뭐냐고? 가장 더러운 피조물! 가장 비열하고, 가장 음험하고, 가장 잔인한! 호랑이? 악어? 그것들은 우리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어! 게다가 그들은 결코 성인인 척, 사상가인 척, 철학자인 척, 시인인 척 하지 않아! 그런데 이따위 것들을 내 책장에 꽂아 두고 간직하라고? 뭐하게? 저들이 성당에서 여자와 아이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저녁마다 불가에 앉아 스탕달 씨, 보들레르 씨, 지드 씨, 발레리 씨와 우아하게 대화나 나누기 위해? 지구의 모든 표면에서 저들이 살육과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도끼로 여자들을 갈가리 찢어 죽이는 동안? 질식시켜 죽이기 위해 일부러 방을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을 몰아넣는 동안? 라디오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처에서 교수형 당한 시체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동안? 친구들의 이름을 불게 하려고 저들이 사람들의 손발을 불로 지지는 동안?」 --- pp.121~122, 「무기력」 중에서

「파아르스는 타자수를 건드려서 낳은 얼간이 때문에 자네 자리를 탐내고 있어. 자기 자식이라고 인정은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나 봐. 모자란 녀석은 아무도 안 데리고 있으려 하거든. 그꺸고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그 멍청이한테 일 가르치느라 남은 머리까지 하얗게 세고 나면 좋건 싫건 싼 가격에 가게를 인수할 속셈인 것 같아. 내가 법을 무시하고 자넬 데리고 있는 걸 빌미로 삼아. 그는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어.」
「그럼 어떡하지? 문을 닫아?」
「아니. 문을 닫으면 가게는 파아르스 손에 넘어가게 될 거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그렇게 못해. 자네가, 자네가 달아나. 여긴 자네 없이도 한동안은 돌아갈 거야. 마치 잠시 근처에 볼일 보러 나간 것처럼 소지품은 놓고 가. 다짐하건대, 이 가게는 자네와 자네 아들한테 돌아갈 거야. 난 독일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없어.」
다코스타가 그를 품에 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도 참 안타까워…….」
「뭐가?」
「당신처럼 좋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게.」
「누구한테?」
「위선자들한테. 특히, 내가 이 아름다운 순간을 망치지 않기 위해 굳이 이름을 밝히지는 않을 우두머리 위선자한테. 이건 드물게 아름다운 순간, 어쩌면 마지막 아름다운 순간이 될지도 몰라.」 --- pp.156~157, 「베르됭 인쇄소」 중에서

유월의 어느 맑은 날 아침, 나를 향해 다가온 건 바로 그 별들 중 하나였다. 늘 그렇듯, 나는 얼굴을 붉혔다(얼굴을 붉히지 않고서는 결코 그것을 마주 볼 수 없었다). 나는 내 굴욕감을 덜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우애의 메시지를 담은 눈길을 보내지도 못한 채, 비겁하게도 이미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바닥을 향해 미끄러지던 내 눈길이 도중에 짧고 새하얀 턱수염, 넓고 맑은 이마, 온화함으로 가득한 웃음 띤 눈길에 매달렸다.
뭐지, 저 별은……. 깜짝 놀란 나는 기억을 더듬어 토마 뮤리츠의 가족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 조상들, 그 신교도들…….
나는 문득 예전처럼 너그러운 프랑스를 향해 힘겹게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그를 떠올렸다……. 〈별을 향한 행진…….〉 오, 맙소사! 그것이 진정 끝내 저 별이어야만 했을까?
그가 내 팔을 잡고는 정겨운 말투로 나와 식구들 소식을 물으며, 시테 섬과 생루이 섬이 한눈에 들어오는 센 강 강둑의 그 작은 광장으로 통하는 층계로 이끌었다. [……] 「그렇다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바쳐야만 한다는 말이네. 사람들이 박해를 당할 때, 무엇으로 프랑스인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프랑스 자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무엇으로 그 자손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자기 한 몸 온전하게 지키는 것, 그것도 아주 훌륭한 일이지. 적어도 나중에 봉사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면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기력이 쇠해 어떻게 해볼 수 없다면, 그때는 자기 대열에, 자기 가족들 곁에 남아 십자가를 함께 져야지…….」
--- pp.225~228, 「별을 향한 행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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