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이 아주 오랫동안, 아니 이 런던 도서관에 소장된 이래로 한 번도 열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책을 꺼낸 사서는 우선 먼지떨이를 가져오더니 표지에 쌓인 먼지를 털어 냈다. 검고 두텁게 쌓인 완강한 빅토리아 시대의 먼지. 대기오염 방지법이 발효되기 이전에 축적된 스모그와 안개 입자들로 구성된 먼지들이었다. 롤런드가 매듭을 풀자 책은 갈가리 벗겨지며 푸른색, 크림색, 회색의 변색된 쪽지들을 토해 냈다. 쪽지에는 철필로 휘갈긴 듯한 글씨들. 녹이라도 슨 듯 누렇게 변해 버린 글씨들. 롤런드는 흥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그 육필들을 살펴보았다. 도서 청구서와 편지지 뒷장에 써넣은 비코에 관한 애쉬 자신의 글이었다. 사서는 그 쪽지들이 원래 끼여 있던 모습 그대로 보존된 것임을 확인해 주었다. 책갈피 속에 끼여 있던 그 종잇조각들은 마치 검은 테를 두른 카드처럼 가장자리가 변색되어 있었으며, 변색된 모서리 부분과 책장이 맞닿은 부분이 정확히 일치된 모양으로 보아 원래의 위치 그대로 보존되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 p.16
한 죽은 시인의 책 읽기를 회복시키며, 자신의 탐구 시간을 도서관의 시계 소리와 위장 수축의 느낌으로 재가며 그는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어쩌면 새롭게 발견한 이 귀중한 물건을 블랙커더 교수에게 보여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교수는 우쭐한 기분과 언짢은 기분을 동시에 내보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 보물과 다름없는 자료가 5번 금고 속에 잘 보존되어 있고, 더구나 미국 하머니 시에 있는 로버트 데일 오언 대학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분명 득의의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롤런드는 이 모든 사실을 블랙커더 교수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을 자신만이 소유하고픈 마음뿐이었다. 프로세르피나는 288쪽과 289쪽 사이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300쪽에서 롤런드는 온전하게 잘 접힌 채 끼워져 있는 두 장의 편지지를 발견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펼쳤다. 둘 다 유려한 필체로 애쉬 자신이 직접 쓴 편지였으며, 그가 살았던 러셀 가의 주소와 6월 21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또한 둘 다 〈경애하는 여인에게〉라고 시작하고 있었지만 서명도 없었고 연도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나는 비교적 짧은 편지였지만 다른 하나는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