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관련해 “왜는 신라와 백제 양국으로부터 대국이라고 숭앙을 받는 입장으로 항상 왜와의 사이에 사절의 왕래가 있었다〃는 『수서』「외국전」의 기록이 주목된다. 이 내용은 왜의 사자가 수나라 쪽에 직접 구두로 전했거나 국서에 기록되어 있던 것에 근거한다고 여겨져 왔다. 『수서』에 이 내용이 기대되었다는 점은 수나라 측에서 왜의 ‘대국’입장을 비판했을 것이라는 점을 먼저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기사를 통해 왜국 스스로 존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수나라 쪽이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배세청을 왜에 파견한 이유는 이러한 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긴장 관계에 있고 군비를 정비하고 있던 수의 입장에서 볼 때, 왜의 이러한 주장은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왜가 백제·신라에 대국인 듯 행동하고 두 나라와 빈번히 교섭하고 있다면, 고구려와 인접 지역인 백제·신라의 배후에 가려져 있던 ‘대국’왜의 동향은 수의 동방경략(東方經略)에서 간과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 해 8월에는 수 양제가 계민가한의 아장에서 고구려의 사자와 만났으며 수 양제는 이를 엄히 책망하였다. 왜의 사절이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들어간 것은 이 해 말의 일로, 왜국 사자의 언동이 수나라에 고구려와 왜의 연대에 대해 두려움을 품게 했다고 해도 불가사의한 일은 아니다. 왜의 외교 자세가 수나라에 상상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 이성시, 「고구려 승려 혜자와 쇼토쿠 태자」中에서
고구려의 공적인 대왜 외교의 출발은 양국 관계의 추이로 보아 6세기 중엽이후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이전의 『일본서기』에 보이는 양국의 교섭 내용은 왜국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의 조상 관련 전승 형태나 왜국 내 호족의 전승 속에 부가되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6세기 후반의 한반도는 백제·신라·고구려 3국이 분쟁하는 상황이었고, 고구려가 일본과 접촉을 개시한 배경으로는 신라와의 긴장 관계가 고려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긴메이[欽明] 5년(544)에 숙신(肅愼)이 바다를 건너 사도[佐渡, 오늘날의 니가타현 일부]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일본서기』에 있듯이, 도군(道君)을 필두로 하는 동해쪽 지역의 호족이 독자적으로 대안(對岸)의 고구려나 숙신 등 북방민족과 교섭을 가져 어느 시점에서는 규슈의 이와이처럼 야마토[大和]의 대왕과 대치하는 국면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긴메이 31년(570)부터 고구려가 신라에 멸망당한 668년까지 118년 동안 고구려의 공식 사절이 18차례 일본에 갔다. 쓰쿠시[筑紫]에 도착한 경우도 있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570, 573, 574, 668년에는 고시국[越國]에 도착했다. 이는 고시 해안에 도착하는 항로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고구려 사절의 왜국 파견은 570년 이후 25회에 이른다. 이 중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의 사절은 모두 7회로, 안승(安勝)을 수반으로 하는 보덕국(報德國)에서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려의 파견 등 문물을 전한 5회를 제외하면 양국의 공적 외교의 횟수는 18회이다. 대체로 7세기 이후의 한정된 시기에 이뤄진 것이어서 양국 교류의 시대적 특징을 보여준다. 오랜 분열 시대를 끝내고 통일 왕조를 이룩한 중국 대륙의 정세 변화, 신라 세력의 고구려 영역으로의 침투, 신라와 당의 결합에 의해 위기의식을 느낀 고구려가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왜 외교를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 윤재운, 「동해 항로의 유래와 경로」中에서
고대 일본의 기와는 6세기 말에 백제에서 도입되었다. 본격적인 사원으로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나라현 아스카사를 조영할 때 사원 조영에 관계된 각 분야의 기술자가 백제에서 도래했다고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출토된 기와는 백제 후기의 수도였던 부여지역에서 출토된 기와와 매우 유사한 문양을 보이는 것들로 일본의 기와가 백제계 기와에서 출발한 것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일본 고대 기와의 종류로는 수막새, 수키와, 암키와, 치미, 귀면와, 서까래기와 등이 있으며 전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기와의 본격적 수용은 아스카사를 조영할 때 백제 기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스카사의 조영에 관한 『일본서기』의 기술에서도 기와의 수용이 사원건축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아스카사 창건시기의 기와는 백제와 동일한 소문의 연잎을 보이고 있는데, 연잎이 10엽과 11엽으로 표현된 점 등은 백제계와 다른 일본의 독자적인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문양뿐만 아니라, 제작기법에 관한 비교연구로 일본의 백제 기와 수용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의 기와 수용에 관해서 논의할 때, 아스카 지역에서 수용한 것과는 별도로 기타큐슈[北九州] 지역 일각에서도 초기의 기와가 생산되었던 사실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출토 유적으로는 후쿠오카현[福岡?] 우시쿠비[牛頸] 요지군(神ノ前 2호요, 月ノ裏 1호요) 등이 알려져 있다.
--- 지다 다케미치, 「삼국의 기와와 일본의 기와」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