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삶은 정치인이나 유명인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공적 삶을 산다. 모든 삶에 공적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삶은 희미하게라도 분명 정부, 경제, 교육 제도, 미디어 등의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는 누구든 공적 삶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불가피하게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 당신이 ‘정치’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해도, 즉 더 이상 투표도 하지 않고, 신문 헤드라인도 읽지 않고, 세금과 의료 제도에 관한 대화는 의도적으로 피하고, 한쪽에서 몸을 숨기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기 일만 한다 해도, 공적 삶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당신은 제한적이고 아주 소극적이며 아마도 무책임하게 공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삶을 사는 것이다.
---「머리말」중에서
학교 교육은 지식과 기술 습득에 머물지 말고, 성품 형성과 올바른 삶에 대한 성찰도 포괄해야 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회에서 시민들은 올바른 삶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다원성을 고려할 때, 공립 교육 기관들은 올바른 삶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 시각을 옹호해서도 안 되고, 그 시각에 따라 아이들을 양육하려 해서도 안 된다. 공립학교가 수도원이나 마드라사나 예시바 같은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사회적 다원성을 빙자하여 공립 교육을 지식 습득과 기술 훈련에만 국한시켜서도 안 된다. 다원적 공립학교 교육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 문제들을 성찰할 자료와 기술을 제공할 수 있으며 제공해야 한다.
---「6. 교육」중에서
낙태라는 이슈와 관련하여 신앙에 충실한 기독교적 공적 참여를 하고자 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 생명의 고귀함이 구체적으로 함축하는 바는 이것이다. 즉, 우리는 낙태 횟수를 효과적으로 줄이는 조치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신 기간 중 어느 때에 낙태가 일어나는지에 상관없이 낙태를 줄이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한 가지 이유는, 인간 생명이 언제 시작되느냐에 관한 논의는 복잡하고 의견 일치가 되지 않으므로, 엄청나게 조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된 지 훨씬 후에야 태중의 인간 생명이 시작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해도, 아직 인간 생명이 아니지만 성장하고 있는 새 생명이 보호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여기서 주요한 기준은, 어떤 조치들이 낙태를 줄이는 도덕적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느냐다.
---「11. 새 생명」중에서
우상숭배가 다 그렇듯, 건강을 숭배하다 보면 건강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 더욱이 건강에 대한 집착은, 어떤 면에서는 의를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절대 완벽한 의를 이루지는 못하면서 결국 오만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육체의 건강에 집착하다 보면 영혼에 병이 든다. 그러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 같은 근엄한 자세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경시한다. 이렇게 기도하기도 한다. “하나님, 제가 저 사람들, 저 태만한 이들, 흡연자들, 과식하는 자들, 심지어 이 게으름뱅이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는 건강에 부주의한 것 못지않은 죄다. 또 건강에 부주의할 때 그렇듯이, 건강에 집착하는 것도 정치적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
---「12. 건강과 질병」중에서
일과 의미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일이 주로 직장과 관련되어 있는 문화에서, 비생산적 은퇴는 존재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일이 없는 삶은 목적 없는 삶처럼 보인다. 노인들을 효과적으로 보살핀다는 것은, 의미 있는 활동을 할 기회를 제공하고 평범한 삶의 유익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정상적 생활이 힘든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 노인들을 그저 보살핌 받는 사람들로 대하는 대신 그들의 능력을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
---「13. 노후의 삶」중에서
누구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또 우리 모두 하나님께 소중하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인간도 고의로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 (…) 인간에게는 고의로 인간 생명을 죽일 권리가 없다. 우리는 삶 안에서 스스로 결정권을 갖기는 하지만, 생명 연장에 관한 결정권은 없다. 또 생명은 고귀한 선물이긴 하지만, 죽음이 최악의 재앙은 아니다. 마치 생명이 ‘두 번째 하나님’인 양 생명에 매달리는 것은, 생명을 우상화하고 죽음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 셈이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죽음이 다가올 때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서도 안 되고, 우리 자신의 경우든 동료 인간의 경우든 죽음을 재촉해서도 안 된다
---「14. 생의 종말」중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시해 주신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또한 원래 지음받은 바로 그 존재가 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 순조로울 때, 우리는 더 우리 자신다워진다.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는 밀폐되어 봉인된 정체성을 갖도록 지음받은 것이 아니다. 사실 자신의 국가나 혈통이나 문화의 ‘순수성’을 주장한 사람 또는 집단의 여러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정체성을 가져 존재가 일그러지면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강하지만 통기성이 있을 때, 우리의 차이가 ‘유연할’ 때, 우리가 ‘포용력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모든 인류를 환영하고 통합함으로 진정 우리 자신이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된다.
---「15. 이주」중에서
우리는 적절한 제도가 자리 잡지 않은 곳에서는 종교의 자유와 동등한 존중을 구현하는 정치 제도를 육성하고, 적절한 제도가 있는 곳에서는 그 정치 제도를 육성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 인구가 다수인 나라들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신앙들을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 그들의 종교 활동을 거부하고 제한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유혹에 맞서서 다른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
---「20. 종교와 무종교의 자유」중에서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헌신함으로 우리의 영광에 무관심해지면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의 한계를 예리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 나라의 넓이와 장엄함 그리고 그것이 변화시키는 창조 세계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히면, 상대적으로 우리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삶에서 모든 선을 다 접할 수 없음을, 또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선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와 동시에, 창조 세계의 깨어짐과, 그 나라와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고 비통해하며, 괴로울 정도로 명확하게 우리 선의 한계들을 본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다(눅 18:9-14). 겸손은 자기 평가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솔직한 자기 평가를 하게 한다.
---「22. 겸손」중에서
우리의 공동체들은 또한 행동이 필요하다. 진정한 번영을 목표로, 용기 있고, 겸손하고, 정의롭고, 존중하는, 긍휼의 마음을 가진 참여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저 자기 할 일만 하면서, 함께하는 공동의 삶이 알아서 잘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세심한 집중과 사려 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도전에 응하자.
---「맺는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