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뜰 때마다 잃어버린 뜨거운 ‘기대’의 감각을 찾아 헤맨다. 결여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적극적인 실체인 뜨거운 ‘기대’의 감각. 그것을 찾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 나면 또다시 수면의 비탈길로 자신을 유도하려 한다. 잠들어라, 잠들어라,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잠든 인간을 모방하라. 문득 인부들이 정화조를 만들기 위해 파 놓은 직사각형 구덩이가 어둠 속에 떠오른다. 쑤시는 몸속에서는 황폐하고 쓰디쓴 독이 증식해 귀와 눈, 코, 입, 항문, 요도를 통해-튜브에 들어 있는 젤리처럼-스멀거리며 기어 나오려 한다.
--- p.8~9
나는 분명 자신을 잃었다는 철학자와 똑같이 쥐새끼를 닮아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내리막길을 향해 치닫고 있고, 분명 그 내리막길은 죽음의 냄새가 좀 더 짙은 장소로 향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뜨거운 기대의 감각은 언제까지고 회복되지 않았다.
“새 생활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돼, 형”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하지만 풀로 된 나의 집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지.” 나는 절박한 기분으로 말했다. 글자 그대로 푸르고 그리운 내음이 나는 풀의 집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형, 나와 함께 시코쿠로 가지 않겠어? 새 생활을 시작하는 방법으로 나쁘지 않을 거야. 사실 그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머리를 시차의 체로 거르면서 날아온 거라고.”
--- p.78~79
“이번에 골짜기에 와보고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어. 업루티드(uprooted)라는 말을 미국에서 종종 들었어. 뿌리를 확인해보려고 골짜기에 돌아왔는데, 결국 내 뿌리는 이미 오래 전에 완전히 뽑혀 나가 나는 뿌리 없는 풀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어. 나야말로 업루티드야.
나는 이제 여기서 새로운 뿌리를 만들어야 하고, 당연히 그에 걸맞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껴. 어떤 행동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저 행동이 필요하다는 예감만이 강해지거든. 태어난 장소에 돌아왔다고 해서 그곳에 자신의 뿌리가 온전히 묻혀 있지는 않아. 감상적인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풀의 집은 남아 있지 않았어, 형.”
--- p.123~124
예전부터 알고 지내온 골짜기 사람들은 나와 다카시가 슈퍼마켓 체인점의 소유자에게 곳간채를 팔아넘긴다는 것을 안 뒤에도 그의 전력에 관해서는 무엇 하나 말해주지 않았다. (……) 마을 사람들의 완벽한 침묵이, 나의 의식 전역을 묵직하게 내리눌러 그 정도의 여유밖에 남겨놓지 않았다.
“단순해, 미쓰. 골짜기 사람들은 20년 전에 강제로 끌려와 숲으로 벌채 노동을 나갔던 조선인들한테 이젠 경제적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라네. 그러한 감정이 암암리에 쌓여서 일부러 그를 천황이라고 부르는 원인이 된 거지. 골짜기는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다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둡고 악질적인 무언가가 골짜기 사람들과 슈퍼마켓 천황 사이의 상호 관계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 p.185~186
앞뜰에 쌓인 눈 위를 벌거벗은 다카시가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1초 동안 내리는 모든 눈송이가 그리는 선이 골짜기 공간에 눈이 쏟아져 내리는 동안 그대로 유지될 것이며 그 외에 다른 눈의 움직임은 있을 수가 없다는 묘한 고정관념이 생긴다. 1초 동안의 실체가 무한으로 연장된다. 눈 소리가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는 것처럼, 시간의 방향성 또한 언제까지고 내리는 눈에 흡수되어 상실된 상태다. 편재하는 ‘시간’. 벌거벗고 달리는 다카시는 증조부의 동생이며, 나의 동생이다. 100년 동안의 모든 순간이 이 한순간에 응축되어 있다.
--- p.296
“조선인이 이 분지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다들 얘기하고 있다고요! 조선인 따위는 몽땅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
“진, 이 분지의 사람을 조선인이 해친 적은 없어. 전후의 이런저런 일들은 양쪽에 책임이 있어. 이렇게 어리석은 소동을 일으켜 결국 참담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은 골짜기 마을 사람들이야. 슈퍼마켓 천황은 체인 스토어 중의 한 채가 약탈당한 정도로 타격받지는 않을 테지만, 골짜기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전리품 덕분에 이제부터 훨씬 더 참담하고 떳떳지 못한 기분을 계속 맛보게 될 거야.”
“골짜기 마을 사람들 모두 공평하게 수치를 당하니 잘된 일이잖아요!” 진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인 채 남의 일처럼 되풀이하며, 나로 하여금 그녀의 표현인 ‘수치’라는 말의 독특한 내적 의미를 납득하게 만들었다.
--- p.382~383
‘나는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고 느꼈어요. 생각해보면 언제나 폭력적인 인간으로 나를 정당화하고 싶은 욕구와 그와 같은 자신을 처벌하고 싶은 욕구로 분열되어 살아왔지요. (……) 안보 투쟁 때 내가 굳이 폭력 장소에 돌입하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은, 그와 같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폭력적인 자신을 폭력적인 인간의 틀에 넣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왜, 그와 같은 자신이라고 다카는 말하는 거죠? 어째서 자신을 폭력적인 인간이라고 하는 거죠?’ 그때까지 내내 침묵하고 있던 아내가 슬픈 듯이 물었다. ‘그건, 더 살아갈 생각이라면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경험과 연결되어 있어요.’ 다카시는 엿듣고 있는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드는 침묵 끝에 말했다.
--- p.430~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