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우주의 중심이자 수미산이었다.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그에게 깨달음의 원천이었으며, 이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라는 여행의 종지부와도 같았다.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고 외친다.
내 안에 밀라레빠의 이 명징한 외침이 전해지는 순간 모든 시간과 우주는 정지되었고, 뛰던 맥박도 멈춰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밀라레빠의 말에 홀린 것처럼 네팔과 히말라야를 찾았고, 먼발치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내 심장은 멎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번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내 삶에 아주 장대한 오랜 계획의 일환임을 의심할 수 없다.
이 히말라야 순례기는 하나의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내면의 히말라야로 떠난 여행이다. 내 안에서 히말라야는 단순한 설산이 아니라 속뜰의 깊고 드넓으며, 높고도 웅건한 지고의 지향점이다. 그렇기에 이 여행은 내면으로 떠나는 나를 찾는 하나의 구도의 과정이자 수행이요, 만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정보를 담고 있는 여행 안내서가 아닌, 홀로 걷는 투명한 여행을 통해 자기 안의 히말라야를 찾아가는 삶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외국에 나가 보니 한국의 대학생들이며, 직장을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나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요즘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붐처럼 일어나는 걷기 여행의 흐름을 타고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다른 여행에 비해 히말라야를 걷는 트레킹은 그 어떤 여행보다도 자기 자신을 살피고 내밀한 삶의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자기 탐구의 여행으로 손색이 없다. 트레킹은 차나 운송 수단을 빌려 목적지까지 편히 다녀오면서 눈요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두 발로 걸어 오르는 지난한 과정이 아닌가. 편의 시설도 거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야생의 산 속을, 그것도 해발 3,000~5,500m의 높은 설산의 기슭이나 봉우리까지 직접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걸어 올라야 한다. 그 걷고 걷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은 고요함을 찾게 되고, 오래고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잊고 지냈던 본래적인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흡사 구도자들의 수행의 길과 다르지 않다. 가부좌가 그렇듯, 걷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생각을 비우고 무심(無心)으로 나아가게 하는 아주 중요한 수행 방법이다. 오랫동안 걷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생각이 멎는 것을 경험한다. 생각이 단순 명쾌해지고 저절로 욕심과 집착과 내면의 화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 삶에 대한 지혜로운 사유와 사색이 뒤따른다. 비로소 삶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적력한 자각이 열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눈뜨게 되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다운 독자적 삶의 방식을 깨닫곤 한다.
여행 중에 만난 한 여행자가 칼라파타르 그 높은 고지까지 갔다 오면서 추억이 될 만한 작은 조약돌 하나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아니면 인도 갠지스 강에서 작은 물병에 물 한 방울 담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곳은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얻어오는 곳이 아니라 다만 내려놓고 오는 곳이다. 그래서 성지를 여행하는 여행자는 언제나 비우고 비워 작아져 돌아오지, 무언가를 키우고 얻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여행을 통해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작아진다. 우리가 그동안 ‘나’라는 틀 속에 갇혀 아옹다옹하며 돈, 명성, 권력, 인기, 소유 등을 끊임없이 늘리고 확장해 오려고 애썼던 자기 자신의 에고(ego)와 아상(我相)을 겸손히 비우고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아집과 집착과 욕망과 소유물의 크기를 나의 존재감으로 알고 키워오려고 애쓰던 그 마음을 한껏 작아지게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에 빠져 살지만, 여행을 떠나 삶을 관조하게 되면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작아짐의 즐거움은 곧 정신적 차원의 무한한 확장을 의미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작아지고 작아져 무아(無我)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 되는 우주적 참된 자아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상이 작아질 때 본연의 지혜로운 참 나는 한껏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막막한 삶의 갈림길 앞에서 지혜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우주적인 답변을 들을 수도 있으며, 햾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에 대해 내 안의 붓다께 신께 직접 답변을 듣게 되기도 한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아상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며 두 발에 의지해 걷고 걷는 과정 속에서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과 함께 삶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삶이란 본래 완전한 것이었으며 질문도 답도 모두 내 안에 구족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누구에게나 구도(求道)의 한 과정이다. 우린 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된다. 누구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깨달아야 할 귀중한 선물을 얻게 된다. 특히 홀로 걷는 여행은 또랑또랑한 지혜로써 삶을 빛나게 한다.
쿰부 여신의 명징하고도 포근한 품속을 느릿느릿 걸으며 얻은 것, 아니 내려놓은 것들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회향하며, 이 한 권의 책이 여행을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 안에 잠재해 있던 구도의 향기를 꽃피우고, 순례의 여정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또한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일상에 갇힌 이들에게 한번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과 동시에 ‘내가 영적으로 커지는 즐거움’을 깨달아가고 있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각별한 연대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 모든 여행자들에게 깊은 깨달음이 있길 소망해 본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목탁소리의 많은 법우님들과 선후배 도반 스님들, 그리고 불광출판사 사기순 편집부장님을 비롯한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0년 초여름 운학사에서
법상 합장
--- 저자의 말 중에서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 너무 생각이나 판단에 의존하려 하지 말라. 과거의 기억들로 오늘을 판단하거나 과거의 색안경으로 지금 이 순간을 평가하지 말라. 무심(無心)의 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가보라. 생각이 놓아지는 순간 우리 마음은 짧은 평화를 경험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생각이 힘을 잃고 대신 그 자리에 무심과 관조(觀照)가 빛을 비출 때 우리의 의식은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바로 그때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나 기존의 관습을 넘어서는 번뜩이는 창의, 그리고 기억과 사고 너머의 깊은 존재의 심연 속에서 지혜의 가르침들이 직관적이고도 창조적인 영감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생각과 기억이라는 과거의 잔재, 또 계획과 바람과 욕망이라는 미래의 잔재가 모두 사라진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존의 순간에 깃드는 것이다.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 중에서
이 척박한 먼지 나는 산비탈에서 신비롭게도 도량 주위에만 졸졸졸 생명수가 흐르고, 그 주위로 초록의 생명들이, 또 꽃들이 거짓말처럼 내 시선을 잡아끈다. ‘이래서 이곳에 오랜 곰파가 설 수 있었구나.’ 대자연이 품어주는 곳, 이 황량한 곳들 가운데 유독 이 산자락, 이 터에만 이렇게 생명을 품어 주도록 그렇게 우주에서는 이미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우주법계의 숭고한 뜻을 이을 이 시대의 눈 밝은 수행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 뿐! 이런 곳에 앉아 설산을 붓다로, 면벽으로 여기며 ‘나는 누구인가’를 들고 관조(觀照)를 이어간다면 그 어떤 게으른 수행자가 제 허튼 정신을 깨고 이 외외당당(巍巍堂堂)한 쿰부 설산의 협조를 받지 않을 수 있을 건가.
- ‘밀라레빠의 노래, 욕망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가자’ 중에서
아무리 걸어도 인적이 없다 보니 문득 이 적막공산 음음한 행성 위에 나 혼자만 삶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존적 외로움이 가슴 한 켠을 스친다. 말 그대로 산공야정(山空野靜). 순간 허우룩하면서도 텅 빈 고독이 내면에 낮게 깔리며 가슴 벽을 두드린다.
이 순간의 걸음걸음이 나를 깊이 깨어나게 하고, 살아있게 만든다. 삶을 진하게 경험한다. 루소는 걷는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애를 통해 그토록 깊이 생각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본연의 내 모습을 되찾았던 적은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오로지 내 발로 직접 걸었던 여행을 통해서만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루소의 말처럼 두 발로 직접 걷는 여행,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삶을 진하게 경험하게 해 주며 본연의 자기 자신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 ‘반짝이는 삶을 엿보다’ 중에서
명상할 시간이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많이 걸으라. 온갖 생각의 짐을 짊어지고 걷지 말고 그냥 걸으라. 생각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홀로 걸으라. 그렇게 텅 빈 걸음을 내디딜 때 비로소 이 우주와의 진정한 관계성이 회복되고 지난 시간을 살아 온 나의 삶이 분명하게 보여 지기 시작할 것이다. 걸으며 애써 수행이나 명상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자주 하려는, 성취해 내려는 그런 마음으로 인위적인 ‘걷기 명상’을 해서는 안 된다. ‘걷기 명상’은 진정한 명상이 아니요, 오직 다만 ‘걸을 뿐’이 되었을 때만이 참된 명상과 연결될 수 있다. --- ‘걸을 때 정신은 우주와 연결 된다’ 중에서
이제부터라도 무지를 털고 깨어나야 한다. 모두가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면서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 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푸른 자연, 깨끗한 물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히말라야의 감동스런 풍경과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천진함과 무한함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지켜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이 엄청난 파괴의 일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 모든 모순을 깨고 나부터 이 지구 행성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할지라도 그 작은 것이 우주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윽하고도 강력한 공명의 힘을 가지고 주위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 ‘불편하게 사는 즐거움’ 중에서
‘말을 잊게 만드는 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그런 풍경 속에서 우리는 말을 잊고, 글을 잊으며, 생각과 지식을 잊는다. 오직 장엄한 풍경 앞에서 모든 것이 멈춰진다. 세상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침묵할 뿐이다. 별 앞에 설 때나 푸른 초원의 언덕 너머로 떨어지고 솟아오르는 일몰과 일출을 마주할 때, 이와 같은 설산의 산령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마음은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그저 경이감에 현묵할 수밖에 없다. 그 숭고함은 언어를 초월해 있고, 시성(詩聖)의 그 어떤 표현보다도 더 깊고 넓다. 바로 그 모든 것이 침묵하는 외경과 신비의 순간,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 우주 본연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깊이의 생명력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지식과 정보와 온갖 종류의 과거의 흔적이 끼어들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바라봄이다. --- ‘알고 떠나는 여행, 모르고 떠나는 여행’ 중에서
여행을 떠나고 싶은가? 히말라야를 그리워하는가? 삶이 팍팍해서 여행이나 떠나볼까 하는 여행자도 있고, 풀리지 않는 꽉 막힌 삶의 흐름을 여행을 통해 뚫어보려는 이도 있으며, 그저 여행을 업처럼 삶처럼 되풀이하는 이도 있다. 때로는 너무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마음뿐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이도 있다. 그러나 여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삶의 여행이다. 인생의 여정을 경건한 순례의 길로 여기는 자에게는 매 순간의 삶이 바로 거룩한 순례의 길이며, 그러한 이가 바로 구도자이며 또한 순례자다.
--- ‘순례, 삶이라는 또 다른 히말라야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