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년)
1897년 11월 8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존 데이와 그레이스 데이의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04-1906년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경험했다. 1906년 시카고로 이주해 청소년기를 보내다. 다문화적인 시카고의 풍경 속에서 잭 런던, 업튼 싱클레어 등의 책을 읽으며 예술적 감수성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1914년 어바나 샴페인 소재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하여 급진적인 사회사상이 담긴 책들을 읽으며 사회당에 가입했다.
1916년 가족을 따라 뉴욕으로 이주했다. 1917-1918년 뉴욕의 사회주의 신문 「콜」과 월간지 「대중」의 기자로 활동하며, 트로츠키를 만나 인터뷰하고 어린이 노동과 가난한 자들의 현실을 보도했다. 뉴욕의 급진주의자들, 지성인들, 작가들과 어울리고, 극작가인 유진 오닐과 절친하게 교유하다. 백악관 앞 여성참정권론자들과의 연합 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어 옥중 단식투쟁을 벌였다. 유년 시절 이후 손 놓았던 성경을, 옥중에서 읽기 시작하다. 전쟁중인 세상에 좀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위해 브룩클린 킹스 카운티 병원에서 간호 실습생으로 활동하면서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1919년 1년 만에 간호사직을 그만두고 「대중」의 후속지인 「해방자」의 기자로 복귀했다. 신문기자 리이오넬 모이즈의 아이를 가졌으나 가슴 아픈 낙태를 하다. (이후 그녀는 완고한 낙태 반대자가 되었다.)
1920년 문학출판기획자 바클리 토비와 결혼해서 유럽으로 떠났다. 1년 만에 파경에 이른다. 1922-1923년 「뉴올리언스 아이템」 기자로 활동했다. 1924년 자전적 소설 「열한 번째 처녀」를 출간한다. 이 책의 영화 판권이 판매되어 스태튼 아일랜드 해변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1926년 생물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이며 무신론자인 포스터 배터햄을 만나 사랑에 빠지다.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함께 생활하며 행복한 시절을 지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발견한다. 1927년 딸 다말 테레사가 태어났다. 12월 28일,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다. 그녀의 회심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포스터와 헤어졌다. 1929년 할리우드 영화제작사의 시나리오 작가로 3개월간 캘리포니아에 체류하다. 이후 멕시코에 6개월간 체류한다. 그해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930년 여름에 뉴욕으로 복귀하여 잡지 「커먼윌」과 「아메리카」에 기고했다. 1932년 12월 대공황의 절정기에 일어난 “굶주림의 행진”을 취재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 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야만적인 처리와 그들을 그토록 힘들게 만든 현실 상황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분노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이 사용되기를 기도한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뉴욕에서 장차 영적 스승이자 동지가 될 피터 모린을 만났다. (이 만남은 평생 동역의 시작이었다.) 그와 함께 “가톨릭 노동자 운동”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1933년 5월 1일 뉴욕 유니언 광장에서 「가톨릭 노동자」 신문 창간호 2천5백 부를 배포하다. (이후 이 신문은 1936년 15만 부까지 발행 부수가 늘었으나, 평화주의 노선을 견지한 까닭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만 부로 구독자 수가 줄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긍휼사역’의 일환으로 “환대의 집”을 열었다. (이를 시작으로 1936년까지 미국 전역에 33개의 환대의 집이 세워졌다.) 1935년 녹색 혁명을 위한 농촌 공동체인 공동 농장을 시작한다. 「가톨릭 노동자」 신문이 초기 기독교 정신에 근거한 평화주의 입장을 밝혔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후 자신을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라고 밝힌 프랑코 총독과 그의 파시스트 당 쪽으로 미국 가톨릭교회의 여론이 기울자, 「가톨릭 노동자」 신문은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했다. 독자들의 거센 반발과 구독 취소가 잇따른다. 1938년 자신의 신앙 여정을 그린 「유니언 광장에서 로마까지」를 출간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가톨릭 노동자」 신문은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하며 안팎으로 많은 공격을 받다. 가톨릭 노동자 운동의 초창기 상황을 기록한 「환대의 집」을 출간하다.
1940년 피정을 가톨릭 노동자 공동체의 기본 영성 훈련으로 제안했다. 1948년 5월 15일 영적 스승이자 동지인 모린이 세상을 떠났다. 1952년 자신의 영적 순례기인 대표작 「고백The Long Loneliness」을 출간한다.
1955년 핵공격 대피훈련에 반대하여 불복종운동을 벌이다. (계속된 시위로 인해 데이는 여러 차례 벌금형을 선고 받고 유치장에 수감되기도 했으나, 시위는 1961년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1962년에 대피훈련이 중단되었다.) 1956년 2월 흑인 민권운동이 고조되던 시기에 백인 극열단체인 KKK단쟀 위협과 공격 속에 있던 기독교 농업 공동체 ‘코이노니아’를 방문하던 중 총격을 받았다. 1962년 혁명이 발발한 쿠바를 방문하여, 쿠바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대해 「가톨릭 노동자」 신문에 연재했다. 1963년 “평화를 위해 일한 어머니” 50명과 함께 로마 순례를 떠나다. 교황은 공공접견중 이들을 언급하며 감사를 표한다. 가톨릭 노동자 운동사를 기록한 「빵과 물고기」를 출간했다.
1965년 바티칸 공의회가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선언을 내놓기를 바라며 로마에서 19명의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열흘간 단식하다. 가톨릭 노동자 운동과 관련된 다수의 사람들이 징병을 거부해 감옥에 가거나 대체복무를 선택했다. 1970년 캘커타를 방문해 마더 테레사와 만났다. 1973년 일흔다섯의 나이로 농장노동자연합 시위에 가담하여 마지막으로 투옥되었다. “일생 동안 괴로운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편안한 사람은 괴롭게 했다”는 이유로, 노트르담 대학으로부터 레테르 훈장을 받다. 1974-1975년 예수회 회원들이 수여하는 이삭 헤커상과 간디 평화상을 받는다. 1976년 필라델피아 성체대회에서 마더 테레사와 함께 강연했다.
1980년 11월 29일 여든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비에는 빵과 물고기 문양과 함께 ‘데오 그라티아스[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글이 새겨졌다.)
신학과 불문학을 전공했고, 시인이자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물댄 동산 같은 내 영혼」(요단), 「잔인한 자비」(복 있는 사람)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