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못됐다’는 표현이 ‘문학적’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쓰이기도 한다. 풀어 말한다면 그것은 한 작가가, 더 정확하게는 이제 글을 쓰기 시작하는 한 작가가, 기존 문단에 자신의 주제와 문체를 들이대면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제법 건방지게 선언한다는 뜻이다. 아마도 선배들은 ‘우리가 그걸 몰랐던 것은 아니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는 것과 실천 사이에는 한 세대가 붙잡아 낸 자신감이 있다. 최진영의 소설에는 그 자신감이 가득하다. 주인공 소녀는 어머니를, 어머니의 사랑을 찾는다. 소녀는 찾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는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지극히 못된 방식으로, 유혈낭자하게, 제가 찾던 것이 된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세계에서 아는 것을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못될 때만 가능한 일인가. 최진영이 오랫동안 못된 소설가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황현산(문학평론가)
잘 읽히는 것은 결함인가 미덕인가. 확실한 것은 이 작품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의 경우, 가독성은 재능이자 문학적 미덕이라는 것이다. 귀하고 탁월한 감수성이다. 내밀하고 팽팽히 조인 리듬감이 서사를 힘 있게 밀어내고 있다. 소녀가 찾는 ‘어머니’는 단순히 어머니에만 머물지 않는다. 무거운 주제를 재기발랄하면서도 가볍지 않게 다루는 작가의 장인다운 손끝 역시 아름답고 믿음직하다. 우리 소설문학의 새로운 아이콘이자 희망이 되리라는 예감을 갖는 데 손색이 없다.
박범신(소설가)
이런 느낌을 주는 소설을 읽은 건 꽤 오랜만이다. 개념어나 추상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모진 세상의 풍경을 생생히 느끼게 하는, 말을 다루는 재주와 신선한 감수성이 빼어나다. 소설의 존재 이유가 삶이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지는 데 있다면, 최진영은 고정화되고 정형화된 모든 것을 뒤집어보고 거꾸로 보는 매서운 눈썰미를 지녔다. 맹랑한 신인작가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공지영(소설가)
소녀는 말한다. ‘엄마의 구멍을 찢고 바깥으로 나왔던 그 순간, 이미 끝을 경험’했다고. 이 얼마나 지독한 문장인가? 성장이 슬픈 것은 자연스러워야 할 성장을 인위적인 것들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이름조차 행방불명된 한 소녀의 성장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고, 무겁게 만드는 것은 그 무게만큼 함몰된 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비판하진 않지만 질긴 사유가 있고, 건조한 삶이지만 그 속엔 우리들의 치부가 칼날처럼 서 있다. 이처럼 당돌한 성장기는 없었다. 이런 소녀가 없었다고 발뺌하지 말자. 당신 옆을 스쳐간, 우리들을 스쳐간 그 소녀는 먼 곳에 있던 게 아니었다. 고작 우리들과 한 뼘의 차이가 날 뿐이었다.
박성원(소설가)
이 작품을 꿰뚫는 것은, 선혈이 뚝뚝 듣는 어떤 목소리다. 이 작품을 읽는 일은, 매일같이 내 귓전을 스쳤으나 듣지 못했거나 듣지 않으려 했거나 들었어도 외면해온 그 목소리에 귀를 내주는 행위다. 순식간에 내 귓속으로 침투하여 에일리언처럼 내 안일을 파괴하고 내 심장을 울리고 말 그 목소리에.
박정애(소설가)
고드름 녹은 차디찬 물에 머리통을 들이밀며 단련한 듯한 문장이다. 단단하고 야무지다. ‘이년’, ‘저년’ 혹은 ‘언나’라 불리는 한 소녀의 막장세상 주유기. 소녀 속엔 신생아 마녀부터 늙어 고부라져 쉰 냄새 풍기는 치매 마녀까지 다 들어있다. 빗자루 타고 세상 후미진 곳을 떠도는 새끼 마녀의 전갈을 읽으며 가슴 한편이 찌르르하다. 마녀계 족보의 진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명랑파 마녀의 등장이다.
김선우(시인·소설가)
‘세계의 가짜를 다 모아서 태워버리면 결국 진짜만 남을 것이’라고 믿는 가출 소녀, 이 나라 구석구석을 종횡하며 저토록 밑바닥인 인생들을 생생히 보듬는다. 못나고 실패하여 가짜 취급 받는 생애들, 소녀와 소통하자, 결국 진짜일 수밖에 없는 유의미의 생애로 거듭난다. 내 옆을 스쳐간 소녀의 이름은 심청이 아닐까. 멀어버린 눈을 깨우는 연꽃!
김종광(소설가)
『당신 옆을 스쳐간 소녀의 이름은』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성장담이자 모험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 작품에 한 표를 던진 것은,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던 톨스토이의 저 오랜 신념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낯선 세상에 오직 ‘물음표’를 앞세우고 전진하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회색빛 세상이 어느새 ‘드드득’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문득 뒤돌아 볼 것이다. 내 옆을 스쳐간 소녀의 표정을, 그토록 심드렁했던 풍광을. 삶의 감각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위대한 단순성 속에서 새로워질 수 있다.
정은경(문학평론가)
진짜/가짜의 대립 구도 위에서 작동하는 낭만적 아이러니가 이 이야기의 동력이라면, 그 부정성이 환기하는 윤리와 의지는 이 이야기의 전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고전적이며 그에 부합하는 진정성과 품격을 갖추고 있지만, 그 주인공이 세계와의 조화로운 화해라는 낭만적 이념을 따르지 않는 분열적이고 충동적인 여성 주체라는 점에서는 현대성의 극단에 맞닿아 있다. 이 고전성과 현대성이 만나 빚어내는 긴장과 실감이야말로 이 단순하지만 강렬한 이야기가 드러내고 있는 리얼리티의 근거이다.
손정수(문학평론가)
소설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주머니가 아니라, 내용물을 꺼내려 하면 깨지고 마는 도자기여야 한다. 콘텐츠가 아니라 아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서너 페이지에 한 번쯤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벨트가, 그 자체가 목적인 아름다운 문장들 때문에 멈추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응모작 중에 이 작품뿐이었다.
신형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