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혹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또는 가장 적절한 것으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종교 가운데,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가장 긴급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의 전적인 변형을 중시하는 종교 중 하나이다.
비슷하게 불자들은 이것을 “원숭이 마음”monkey mind[역자주-心猿意馬에서 온 말로 번뇌로 인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생각을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원숭이와 말에 비유한 것]이라고 부른다. 그 작은 짐승이 우리가 가진 것 전부를 취하려고, 한 나뭇가지에서 다른 나뭇가지로 점프한다. 주체/객체라는 양극성을 통해 만들어진 “자기”에 대한 안정적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내면의 혼돈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주위를 소용돌이치는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자기반성적인 “나”는 지속적으로 자기와 관련된 질문을 함으로써 아주 견고하게 세워진다. 가령 세상을 조사하고 측정하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 “여기서는 안전한가?” “그녀는 뭐라고 한 것이었을까?” “나는 괜찮은가?”
“일상적 알아차림”의 또 다른 이름은 “에고적 사고”egoic thinking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정상적인 기능 영역normal functioning zone이다. 당신이 박사이든, 주교이든, 핵물리학자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지성적인지 혹은 얼마나 경건한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별한 영적 훈련이 없어도, 세상에 대한 지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각은 이 알아차림의 수준에서 형성될 것이다.
서방 그리스도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다.”로 시작하였지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당연히 역사를 뛰어넘는 그러한 거대한 도약은 퍼즐의 중요한 조각들을 무시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에서 그리스도교 구도자들은 말씀과 침묵의 기본적인 관상 리듬으로 되돌아가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직관적으로 노력함으로써 헌신적이고 신비적인 운동이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퀘이커교는 그러한 운동의 일환인데, 앞서 말했듯이, 내가 관상기도를 처음 접한 것도 퀘이커교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있었던 관상적 재각성이 현대 주류 그리스도교에서 자랐던 사람들에게 “혁명”과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수련 자체가 그 본디의 정박장에서 얼마나 멀리 가버렸는지를 증명해준다.
“저기 밖에”out there 계신 하느님, 즉 스콜라주의와 뉴턴식 세계관의 하느님 이해는 관상 경험 자체에 의해 철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마음의 동굴로 들어가 거기서 하느님은 살아계시며 모든 것 안에 스며들어 있고 모든 것을 비추고 계시며 모든 것을 불타오르게 하신다는 것을 발견한다. 나 자신의 마음은 거룩한 삼위일체 마음의 홀로그램이며, 활동 중에 있는 사랑이고, 따라서 유한과 무한의 영역은 상호 갈망이라는 깨지지 않는 유대에 의해 연결된다. “여기 안에”in here라는 식의 신관은 예수님과 신비가가 보는 신관神觀에만 가까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과학적 이해의 발견에 의해서도 점차로 확증된다. 잘 알려진 성공회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bara Brown Taylor는 양자물리학을 알게 되면서 생긴 그녀의 하느님 이미지의 급진적인 전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장면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느님은 사방 도처에 계신다. 하느님은 위에도 아래에도 나의 피부 안과 밖에도 계신다. 하느님은 망web이며, 에너지이며, 공간이고 빛이시지만,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으신다. 마치 이 가운데 어떤 개념도 그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진짜인 것처럼, 오히려 거기 있는 모든 것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 단일하고 광대한 관계의 그물망으로 드러나 계신다.
“복음은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이다. 복음은 그 안에 관상적 차원을 가진다. 이 차원은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초대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바로 그 본성을 나누고자 하시는 초대인 것이다. 그것은 귀로, 눈으로, 마음으로 듣는 방법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자란다. 이는 자기의 죽음으로써 혹은 자기를 비움으로써 가능해지는데, 이로써 하느님을 향한 철저한 비움과 하느님의 사랑의 경험이 일어난다. 우리가 관상기도라고 부르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방식을 통해,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하느님 본성의 이 역동적 나눔은 각 인격을 형성하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명을 그들에게 개방한다. 세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에너지의 도구가 되라고 그들을 도전하면서 말이다. 이 관상적 의식은 각 인격을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그리고 모든 다른 인격들과의 일치 안에 묶어준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일들 속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