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두 갈래 길을 내놓으려고 한다. 우선, 회의주의자들에게는 무신론의 토대가 되는 ‘맹목적인 믿음들’을 붙들고 씨름할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그 믿는 바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 확신을 입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기 바란다. 반면, 신앙인들에게는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반론과 맞붙어 보기를 당부한다. 길을 끝까지 가고 나면, 설령 아무 변화 없이 회의주의자나 신앙인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지라도, 예전보다 더 또렷하고 겸손하게 그 입장을 지킬 것이다. 상대방을 향해 지금껏 없었던 이해와 공감, 존중을 품을 것이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서로를 폄훼하지 않으면서도 의견 차이를 한층 더 분명하게 확인할 것이다. 이런 일들은 양 진영에서 상대방의 논지를 가장 강력하고 긍정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일어나는 법이다. 그건 작은 일이 아니다.
영적인 제3의 길을 떠나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은 여러 해 동안 의심을 품은 이들과 나눈 수많은 대화에서 뽑아 낸 진액이다. 설교와 개인적인 대화를 모두 동원해 회의주의자들이 저마다 가진 신앙적 토대들을 살펴보도록 정중하게 돕는 한편, 그들의 더없이 매서운 비판 앞에 내 믿음의 기초들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려 했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오랫동안 수많은 이들에게서 들었던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고 반대하는 일곱 가지 가장 큰 논리들을 살펴볼 작정이다. 하나하나의 이면에 도사린 대체 신앙을 신중하게 분별해 보려 한다. 이어서 후반부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밑바닥에 깔린 논리들을 검증해 볼 것이다.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전통적인 보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정중한 대화가 오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더없이 근사한 일이다. 부디 이 책이 그런 의견 교환이 활발해지는 데 한몫할 수 있으면 좋겠다. 뉴욕에서 목회자 노릇을 하며 겪은 일들 역시 이 글을 쓰는 또 다른 동기가 되었다. 이곳에 발을 디딘 지 얼마 안 돼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신앙을 가진 이들과 의심을 품은 이들의 현실은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상황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뉴욕에서 문화 사업에 종사하는 백인 장년층은 분명히 세속적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다민족 전문직 직장인들과 노동자 계층의 이민자들 사이에는 강력한 종교적 확신이 왕성하고 범주를 가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그들 가운데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처럼 상대적으로 젊은 크리스천들이야말로 해묵은 형태의 문화 전쟁을 끝장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신앙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으로 주요한 연대들의 선봉이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의심 또는 반발과 씨름한 끝에 현재 통용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나 보수적인 공화주의자라는 식의 테두리로 묶을 수 없는 또 다른 정통 신앙을 가지고 제3지대로 모여들고 있다. 지금 ‘문화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양대 진영은 하나님과 공동의 유익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궁극적인 가치로 삼는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진보 진영의 개인주의는 낙태, 섹스, 결혼 따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도드라진다. 반면에 보수 진영의 개인주의는 공공 부문에 대한 깊은 불신과 가난을 단순히 당사자가 제 삶을 책임지지 못한 데서 오는 결과로 치부하는 빈곤 의식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도시를 기반으로 다민족 구성원을 끌어들이며 급속하게 확산되는 새로운 정통 기독교는 빈곤과 사회 정의에 대해 공화주의자들보다 한층 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동시에,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기독교의 윤리적, 성적 도덕률을 훨씬 더 높이 떠받든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적잖은 크리스천들이 의심의 늪을 건너갈 수 있도록 길을 내려 한다.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그들이 세상을 살아 낼 신앙을 더 긍정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지금 그런 교회에 속한 크리스천 셋을 여기에 소개한다.
준(June)은 아이비리그에 속한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맨해튼에서 일했다. 그러나 외모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섭식 장애와 약물 중독에 빠졌다.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길에 들어섰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지만, 딱히 달리 살아야 할 뾰족한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막다른 곳에 몰린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러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실재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용납받길 간절히 바라는 무한에 가까운 갈망을 하나님의 자비와 연결시켜 줄 상담가도 교회에서 만났다. 마침내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언제부터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난생처음으로 “정말 하나님의 딸로서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 뒤로 차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멈추고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제프리(Jeffrey)는 보수적인 유대교 집안 출신으로 뉴욕시에서 뮤지션으로 활동했다. 양친이 모두 암으로 몹시 고생했으며 어머니는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어려서부터 온갖 질병들을 겪은 탓에 도교와 불교의 명상법에 토대를 둔 중국식 양생법을 따랐으며 몸을 건강하게 관리하는 데 지나치리만큼 큰 공을 들였다. 친구가 리디머교회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전혀 ‘영적인 결핍’을 느끼는 상태가 아니었다. 설교를 듣는 건 좋았지만 “예수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만”이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천 친구들이 누리는 장래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런 식의 감정과 마주한 적이 없었다. 이윽고 끝까지 설교를 듣게 되었고 한 구절 한 구절이 예상치 못했던 지적인 도전을 던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끝내는 명상을 하면서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이 자꾸 끼어들어 평소처럼 순전한 고요와 안정이 찾아드는 순간을” 맛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제프리는 크리스천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고통에서 도망치고 총체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그동안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는 내러티브였다는 자각이 찾아왔다. 참으로 부질없는 삶의 목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신체적인 건강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포기했음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장차 닥칠 고통을 모면할 수는 없겠지만 당당히 맞설 용기를 얻고 돌파해 낼 길이 보였다. 제프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켈리(Kelly)는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무신론자였다. 열두 살 때 할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에 두 살짜리 여동생이 뇌종양에 걸려 수술과 화학 치료, 방사선 치료를 받는 것을 지켜보았다. 컬럼비아대학에 들어갔지만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었다. 몇몇 대학 친구들이 제각기 신앙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런 간증들도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즈음 열네 살 어린 동생이 병으로 쓰러졌다. 결국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됐는데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는커녕 한결 절박하게 그분을 찾았다. 대학 졸업 후 켈리는 뉴욕시에서 일하게 되었다. 거기서 장차 남편이 될 케빈(Kevin)을 만났다. 케빈은 월스트리트 제이피모건( J. P. Morgan)사에 다녔는데 켈리와 같이 컬럼비아대학 동문이고 무신론자였다. 하나님에 대한 둘의 의심은 아주 완강했지만 그 의심을 의심할 줄도 알았다. 그래서 함께 리디머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순례 여정은 더디고도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그만두지 않은 것은 주변의 신실한 크리스천들 덕분이다. 세상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세련되고 똑똑한 이들이었다. 마침내 확신이 생겼다. 기독교는 지성적으로 신뢰할 만할 뿐만 아니라 제시하는 삶의 비전도 매력적이었다. 켈리는 이렇게 썼다. “무신론자이던 시절에도 윤리적이고 공동체를 지향하며 사회 정의에 관심을 두는 삶을 산다고 자부했지만, 기독교는 생각과 마음 상태까지 아우르는 훨씬 높은 기준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내 삶에 맞아들였다.” 케빈은 이렇게 고백한다. “커피숍에 앉아 C. 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읽다가 책을 덮고 노트를 꺼내 적었다. ‘기독교의 주장을 둘러싼 증거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무엇을 이루든 궁극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으며, 사람들의 인정은 금방 사라질 뿐이고, 짜릿한 모험을 좇아 사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순간을 즐겨라!) 식의 삶은 또 다른 형태의 나르시시즘과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의심까지 포용하시는 분, 예수
켈리는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씨름하던 시절, 도마의 이야기를 다룬 신약성경 말씀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설명한다. 본문에서 예수는 의심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몸소 보여 준다. 오늘날의 회의주의자들이나 신앙인들의 시각과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입장이다. ‘의심하는 도마’를 마주한 예수는 회의를 묵살하는 대신(“잠자코 믿거라!”) 증거를 보여 달라는 제자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마음에 의심이 가득함을 고백하는 남자를 만난 적도 있다(막 9:24). 그는 예수에게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다. 의심하는 자신을 붙잡아 달라는 뜻이었다. 예수는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내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은총을 베푸셔서 그 아들을 고쳐 준 것이다. 스스로를 크리스천으로 여기든, 아니면 회의주의자라고 생각하든, 본문의 주인공처럼 솔직한 마음가짐으로 의심의 본질을 나날이 깊이 파악해 가면 좋겠다. 그렇게만 하면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의 결실을 거둘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신앙인들은 의심을 자각하고 씨름할 필요가 있다. 제 것만이 아니라 친구와 이웃들의 의심까지 끌어안아야 한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그대로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믿음에 배치되는 생각들과 길고도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자신은 물론 회의주의자들의 확신에 맞설 신앙적 기초가 마련되는 법이다. 이러한 과정은 눈앞의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도 중요하지만,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뒤에도 의심을 품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이해하게 이끌어 준다.
--- p. 23
우리는 도리어 묻고 답하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 영적인 실재에 대한 온갖 주장 가운데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토대로 삶을 꾸려야 한다.
--- p. 44
크리스천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선을 행하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 빚어졌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형상에 관한 교리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이 그릇된 믿음을 가진 이들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에 대한 교리는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정통 기독교 신앙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다고 가르치는 수준보다 사뭇 떨어질 수 있다고 예상하게 한다. 이만하면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협력할 충분한 토양이 준비된 셈이다.
--- p. 54-55
성육신과 십자가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고통 가운데서도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부활의 교리는 강력한 소망을 불어넣는다. 더 없이 갈망하는 삶을 약속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엄청난 용기, 인내, 희생, 또는 구원에 이르려는 안간힘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으니 무한정 아름답고 영광스러울 수밖에 없다.
--- p. 74쪽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신앙 형태에서는 사실일지 모르지만 기독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육신과 대속사역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맞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 고통을 겪고 죽음을 당할 만큼 연약한 존재가 되었다. 십자가에 달려 인간의 한계(죄인이라는)를 받아들였으며 인류를 용서하기 위해 대신 죽었다.
--- p. 96
“크리스천을 크리스천답게 만드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메타노이아(metanoia), 곧 회개란 스스로의 필요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도에 깊이 침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 고통은 거룩한 천사입니다. … 그 천사를 통해 인간은 세상의 온갖 기쁨을 지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해집니다. … 무언가를 갈망하는 고통은 틀림없이 존재하는데, 종종 신체적으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서는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갈망의 고통을 순간순간 이겨 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보다 더 거룩한 천사가 존재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천사입니다.”
--- p. 120
과학과 종교 사이에는 아직 전쟁이 한창이란 통념이 대중들 사이에서 여전히 힘을 떨치고 있지만, 그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거나 크리스천이 될 셈이면 과학과 갈등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등의 의식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한다. 대다수 과학자들은 스스로를 깊이, 또는 적절히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며 최근 수십 년 동안 그 숫자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과학과 독실한 신앙 사이에 괴리가 일어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 p. 157-158
“만일 ‘진화’가 사물의 존재 방식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지위로 올라간다면 성경적인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하지만 ‘진화’가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가설 수준에 머문다면, 창조주를 믿는 크리스천의 생각과 하나님이 창조 과정을 시작하신 방식에 대한 과학적 탐사(생물학적인 차원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 p. 161쪽
현대인들은 기적을 자연 질서의 ‘일시정지’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자연 질서를 ‘회복하는’ 도구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애초에 질병과 주림, 죽음 따위가 끼어들도록 세상을 짓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님은 악한 세상을 대속하고 깨지고 상한 상처를 치유하러 오셨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권세를 가졌다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그 힘을 가지고 하시려는 일들의 놀라운 예고편이기도 하다.
--- p. 162-163
“해가 떴다고 믿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해를 보기 때문만이 아니다. 해가 비추는 세상 만물들을 보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기로 작정한다 치자. 아무리 애를 써도 뜻을 이룰 수 없다. 되레 망막이 타버려서 사물을 분간할 능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태양의 존재와 힘, 성질을 알아볼 셈이면 해가 빛을 비추어 드러내는 세상을 살피고, 햇살이 어떻게 눈앞에 만물들을 살아가게 하며 또 어떻게 인간은 그걸 지켜볼 수 있는지 깨닫는 편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 p. 199
마치 아름다움과 사랑이 의미가 있다는 듯, 삶에 가치가 있다는 듯, 인간에게 타고난 존엄성이 있다는 듯 살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살면서도 이 모든 선물을 준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짓이다.
--- p. 249
누구나 무언가를 위해 산다. 자신의 생각과 상관없이 그 무언가가 ‘삶의 주인’이 된다. 마음에 예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를 완전히 채우며 어떤 잘못도 용서하는 단 한 분, 주님이 되어 주신다.
--- p. 269
기독교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전통적인 종교가 내세우는 가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요 종교의 창시자들은 어김없이 구세주가 아니라 교사로 자리매김했다. 다들 “이러저러하면 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교사가 아니라(교사 노릇을 넘치게 하시긴 하셨지만)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나는 하나님으로 너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러 왔다.” 인간은 스스로의 업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게 기독교의 메시지다.
--- p.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