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는 선입견이 주는 두려움과 더불어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른다는 ‘모름’의 상태가 당신에게 불안감이나 당혹감을 줄 것이다. 백지가 주는 불안함을 견디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창조는 (그리고 삶은) 무엇을 할지 모른다는 ‘모름’의 길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불안에도 불구하고 나의 선線 (그림에서는 그림의 선[line]을, 은유적으로는 자신이 선택한 길[road]을 말한다), 나의 선택, 나의 한 걸음, 나의 자유를 선택하자. 그것이 그림을 창조하는 방법이고, 치유의 원천은 창조력이므로, 당신이 그런 식으로 삶을 창조적이고 치유적으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다.
(/ p.29)
내가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났다"고 말할 때, 나는 우리가 모두 삶의 예술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예술가는 자신의 삶 전체를 창조적으로 만드는 사람이자, 하루하루의 일상을 통해 자신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한 평생을 쏟아 부어야 이룰 수 있는 완성된 결과물이나 숙련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예술가는 삶을 창조적으로 가꾸는 사람들이고, 일상을 특별하게 하는 행위들로 채울 줄 아는 사람들이다.
(/ p.40)
삶을 통제하고자 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이 같은 예술이 쓸모없는 행위이지만, 통제가 안 되고 예측 불가능한 안티프레질한 삶의 영역에서는 예술이야말로 우리를 불안에도 불구하고 온전케 하는 힘이다. 즉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언제 일을 그만두게 될지 모르고, 언제 사랑이 떠나갈지 모르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궁극적으로 통제불능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음을, 아름다움을,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케 하는 힘이 예술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예술적인 영감으로 가꾸고자 하는 사람들, 삶의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 p.51)
아이들은 그림 그릴 도구를 손에 잡을 수 있게 되자마자 그림을 그려 자기를 표시한다. 엄마 루즈든 사인펜이든 뭐든 잡고 벽에 그리고 바닥에 그린다. 이때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기쁨 그 자체다!...... 망설임 없음. 이것은 피카소 같은 미술사에 남은 대가들도 도달하고자 애썼던 예술의 경지이다. 아이는 이미 망설임 없음의 경지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체계와 판단에 걸리면서, 아이는 자신이 예술가가 아님을 배워버린다.
(/ pp.57~58)
두려움을 딛고 ‘애같이’ 쓸모없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이게 뭐라고 이렇게 재밌냐!" 두렵고 부끄럽고 애 같은 짓을 하는 망측함을 극복할 때 사람들은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웃음을 소리 내어 웃고는 한다.
(/ p.76)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의도가 아니라 그림을 따라가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할 것이다....... 의도가 아닌 그림을 따라간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사람 모양을 그리다가 손이 옆으로 미끄러져 팔이 길어졌다고 치자. 이것이 "내 의도가 아니었어요"라거나 "망쳤다"며 옆으로 나간 팔을 지워버리는 대신, 그림을 따라가는 방법은, 옆으로 미끄러지듯 길어진 팔을 따라 그리는 것이다. 그것이 무용수의 긴 팔이 될 수도 있고, 사람 옆을 지나가는 화살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팔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게 뭐지?" 하고 궁금증을 가지고 보면, 고쳐야 할 잘못된 실수가 아니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시작점이 된다....... 처음에는 누구나 막막하겠지만, 일단 움직임이 시작되고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창조적인 흐름에 들어가게 된다. 이 흐름에 들어가면 머리가 맑아지고, 의도가 멈추고, 창조하고 있는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pp.84~85)
세상에는 초급, 중급, 고급, 그런 식으로 나열되지 않는 배움의 영역이 많이 있다. 우리는 글을 읽고 쓰기 전부터 그림을 그린다. 어째서 자연스럽게 있는 능력을 ‘교육’을 통해서 재능이 없다고 배우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비단 미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술 교육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 전반에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배울 필요가 없고, 배워서 안 되는 것들이 있다. ‘망설임 없음’을 어떻게 교육으로 배울까? 창의성을 어떻게 교실에서 배울 수 있는가? 나만의 자국을 만드는 기쁨을 어떻게 데생 수업에서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예술가인 어린아이 시절을 거쳐, 배움의 수감기인 청소년기를 거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배웠고, 그러느라 원래 잘하던 것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배워버렸다.
(/ pp.88~89)
치유적 그림을 그리는 것은 연약함을 드러내는 행위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를 포장하고 방어하는 대신 자신 안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배운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연약함 속에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벽을 뚫을 수 있는 힘인 공감, 사랑, 친절함 같은 보살피는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 p.93)
이 책에서는 창조적인 수많은 방법 중에서 ‘그림 일기’를 소개하는데, 그 이유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첫째, 미술은 무의식과 의식이 소통하는 언어이고, 둘째, 그림은 삶의 모형으로서 삶 전체를 볼 수 있게 한다. 건축가들이 건축물을 짓기 전 먼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모형부터 만드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림도 복잡한 삶을 축소시킨 일종의 모형으로서 삶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 매일매일 만나는 일기의 형식이 일상의 리듬을 만들기 때문이다. 넷째, 변화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것으로, 이는 우리가 시각화된 상상을 이미 일어난 일로 인식을 해서 상상한 대로 믿고, 믿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 p.176)
그림 일기는 자기가 원하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탐구하고, 필요한 과정을 리허설하고, 변화된 모습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원하는 미래를 요술처럼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그 변화를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자신의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삶의 패턴을 만드는 연습을 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믿음과 동기를 키워서, 필요한 행동을 하게끔 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시각화를 통해서 리허설하려면 이미지를 마음속에서 명료히 하고 또 이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면 많은 훈련이 필요한 시각화 명상과 달리 이미지가 잘 잊히지 않고, 실제로 그려진 이미지가 사라지는 일도 없다.
(/ pp.185~186)
변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단계가 지금 여기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자기와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변화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리는 것이 그림 일기가 취하는 변화의 방식이다.
(/ p.192)
나는 낙심되는 일이 있어서 주눅이 들고 우울하고 아무렇게나 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내 안에서 나를 일으키는 존재를 만난다. 나를 무지무지 사랑하는 존재이다. 당신을 아주아주 사랑하고, 당신을 늘 지지하고 응원하고, 당신의 가능성을 펼쳐 열어 보이는 그러한 존재가 당신 안에도 있다. 그림 일기를 통해서 당신을 아주 깊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보시기를 바란다.
(/ pp.194~195)
산다는 것은 채워야 하는 빈 종이를 자꾸자꾸 마주하는 일이다. 빈 종이의 두려움을 기꺼이 마주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실패도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헤매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헤매지 않으면 성장할 수도 없고 변화할 수도 없다. 빈 종이가 두렵더라도 그 두려움을 끌어안고 빈 종이에 점이나 선이나 색으로 자국을 만들어보자. 한두 번으로 삶이 변화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자국들이 모여 그림을 만들고, 또 그 그림들이 변화하면서 당신의 삶이 변화할 것이다. 변화하고 싶다고 말을 늘 하지만, 그제와 같은 어제,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낯선 것을 마주하는 두려움을 끌어안아야 오늘을 조금이라도 다르게 살 수 있다....... 미로에서 길을 찾을 때처럼, 창조적이고 치유적인 여정에서 만나는 헤맴과 모름은 우리를 자신의 중심으로 안내하며, 이 중심을 통과할 때 우리는 변하고 성장한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헤맬 수 있는 길을 나서는 용기를 우리는 그림을 그리면서 배울 수 있다.
(/ pp.200~201)
불만투성이인 현실을 바꾸고 싶지만, 지금 가진 것을 놓지는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종종 한다. 당신은 ‘불만-안정’과 ‘불안-자유’ 중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안정과 자유를 선택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선물 세트는 없다. 변화는 ‘안정’에서 ‘자유’로 향하는 여정이며, 그 길에서 반드시 ‘불만’에서 ‘불안’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겪는다.
(/ pp.209~210)
변화를 위해서 나 자신을 바꾸어야 할까, 아니면 처한 상황을 바꾸어야 할까? 글쎄, 이 두 가지가 그리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자기가 자기에게 해주는 것과 타인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신을 공감적으로 대하다 보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는 타인을 더 많이 만나게 된다. 자기가 자신을 함부로 대하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타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기에게 잘하자.
(/ pp.218~219)
그림 일기 방식의 어떤 면은 마음에 들지만 어떤 면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들여다보고 창조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하면 삶이 변화한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삶 자체가 창조이고, 우리의 생명력 자체가 창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행복한 기분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그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인 경우가 많다. 살아있으려면 창조해야 한다. 창조는 ‘살아있음의 기운’이 움직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