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평양 대동강 가에서 아버지 얼굴에 수 없이 박힌 총알 자국을 어루만지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 다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아버지의 순교는 6·25한국전쟁의 비극입니다. 아버지의 순교 앞에서 “원수를 갚겠다.”는 분노와 함께, “전쟁은 안 된다.”는 전쟁에 대한 분노로 온 몸을 떨게 했습니다. 아버지의 순교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위기의식과 회심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원수에 대한 복수로 되풀이 할 수 없고, 용서와 화해의 생명의 길, 평화의 길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결단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의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로 다시 살아나는 신앙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6·25한국전쟁에서 죽어 간 남과 북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피난민들의 희생의 뜻은 무의미한 희생이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는데서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순교의 뜻은,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화해와 평화 만들기와 통일로 연결되어야 살아남습니다. 증오에서 동정으로, 복수에서 용서로, 적대감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싸움에서 화해로, 전쟁에서 평화로, 분단에서 통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혁명적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말한다면, 순교의 십자가, 민족의 분단의 십자가를 뛰어 넘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 민족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 눈물을 거두고 순교자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 「순교자 서용문 목사」 중에서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1학년 입학하자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은 방과 후에 남아서 미술선생님이 특별지도를 하셨다. 나는 포스터를 잘 그린다고 남한의 김구, 이승만이를 북한 노동자 농민이 망치와 낫으로 머리나 목을 치면, 부산 앞 바다에 빠져 넘어지는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님은 훌륭하신 분이신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릴 수가 없었다. 내가 만일 안 그리면 아버지를 호출 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구도를 잡고 대강 스케치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집에 가서 그림을 완성하여 내일 갖고 오라는 것이다. 나는 밤새 색칠하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림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찢어버렸다고 하시며 그냥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종일 벌을 서고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를 내무서에서 호출했다고 하신다. 아니 자녀 그림 하나 가지고 잡아가다니!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완성하지 못해서 내일 가지고 온다고 선생님께 틀림없이 말씀드렸는데... 북조선은 너무 싫었다. 나는 학교에서의 교육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교회에 항상 형사가 와서 설교 중 북한정치를 비난했다고 끌려가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식의 사소한 일가지고... 선생님께 직접 그런 그림은 안 그리겠다고 거부했으면 차라리 내가 벌을 받든지 고문을 당하든지 할 것 아닌가하고 후회했다.
아버지는 안 돌아오셨다. 다음날 새벽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그냥 자리에 누워버린다.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 「순교자의 딸」 중에서
어머니와 김봉화 집사님이 사선을 넘기 위해 인민군이 주둔한 곳을 답사하면서 인민군에게 “우린 남쪽에서 살다가 폭격이 심해서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내일 다시 이곳을 지나 다시 남쪽 고향으로 내려 갈 테니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어제 어머니와 김봉화 집사님이 인민군 주둔한 곳에 도착하여 어제 보내 준다고 해서 왔노라고 하자, 갑자기 인민군이 땅속에서 튀어 오르며 제가 들고 있던 놋그릇을 열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던지 그 기억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때 그 인민군이 놋그릇을 뒤집었다면 성경도 쏟아져 나왔을 테고 우리는 모두 총살감이었지요. 그 인민군은 놋그릇을 덮어 놓았던 삼천리표 연필들만 보고는 “다시 덮어,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우리 가족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떨리는 손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두 말 없이 앞을 향해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인민군이 주둔하고 있던 곳과 남쪽 치안대가 있는 곳 중간 정도를 지나칠 때 인민군의 총소리가 들려 왔고 남쪽 치안대에서도 총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 「아버지 없이 신앙으로 살아온 아들의 편지」 중에서
장포동교회 교인 중 보안서원(경찰)이 있었는데 아버지께 급히 와 “목사님!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라고 언질을 주었고 교인들도 목사님 몸을 잠시만 피신하시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뒿다.
목사님은 인자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를 염려해줘서 고맙소. 그러나 나 혼자 살겠다고 피할 순 없소. 양들을 버리고 내 어찌 몸을 피해 숨거나 도망갈 수 있겠소. 모여 있는 사랑하는 교인 여러분! 참혹한 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의 날을 위해 기도하시오” 이런 말씀을 남기고 7월 어느 날 보안서원들에게 붙잡혀갔고 그 후 우리 식구들, 어머니와 누나, 철선 형과 함께 우리교회 교인이 살고 있는 평양 근교로 피난을 갔다 얼마 안 있어 평양 탈환을 한 직후에 우리는 장포동교회에 다시 돌아왔다.
보안서에 붙들려간 아버님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고 어디로 잡혀 갔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교인들은 서 목사님은 북으로 끌려갔거나 총살 당하셨을 것 이라고 하였다. 앉아서 아버지가 오시기를 기다릴 수만 없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체를 찾으려 큰형과 교인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기 시작했다. 길게 방공호를 파 놓은 곳에 많은 사람들을 쳐 넣고 그대로 사격을 해 죽임당한 이들도 있었고, 남산에 있는 탄광에 가보니 머리(얼굴)만 내 놓고 몸 전체를 땅에 파묻고 얼굴에 기름 부어 태워서 죽인 사람들은 누가 누구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으나 자기 앞에 옷을 가지런히 개놓아 그 옷을 보고 누구인지 알고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곳에도 아버지는 안계셨다고 한다. 그렇게 찾기를 1주일이 넘었는데 어머니 꿈에 나타난 아버지가 대동강에 계셨다고 한다.
아침 일찍이 어머니와 큰형과 그리고 교인 한 두 명이 같이 대동강 하류 모래사장으로 달려가 뱃사공들이 건져낸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팔을 칭칭 묶은 시체들을 모래사장위에 즐비하게 늘어놓았는데 거기서 굵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12방의 총상을 입고 물속에서 뚱뚱불어 잘 알아 볼 수 없는 싸늘한 아버지의 시신을 마침내 찾아 내셨다. 곧바로 아버지 시신을 교회로 옮겨 교회 앞마당에서 교회 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남산 밑자락 양지바른 언덕에 조그마한 묘를 만들고 판때기로 비석을 세웠다.
--- 「순교자의 아내, 어머니를 기리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