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는 우리 인간이 동물 세계를 어떻게 나누고 구분하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다람쥐는 까만 단추 같은 눈망울이 너무나 귀엽고 붉은 색이 도는(갈색-검정색 버전도 있다)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으며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다. 또 다람쥐가 모아 두고 까먹은 식량 창고에서 이듬해 봄에 어린 나무가 솟아나기 때문에 새로운 숲의 창시자라 불러도 무방하다. 한마디로 다람쥐는 진정으로 유익한 동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바로 다람쥐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가 새의 새끼라는 사실이다. 우리 사택 서재 창으로는 그런 사냥 장면도 목격할 수 있다. 봄에 다람쥐가 나무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면 현관 앞 늙은 소나무에 알을 낳은 회색머리지빠귀의 작은 둥지 밑에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다람쥐는 좋은 동물이 아니라 나쁜 동물인 것일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자연의 변덕은 우리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여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좋거나 유익한 것과는 다른 문제다. 우리가 사랑하는 새를 죽이는 다람쥐의 이면 역시 나쁜 것이 아니다. 다람쥐도 배가 고프고 역시나 새끼에게 젖을 먹여 새끼를 키워야 한다.… 다람쥐는 우리의 분류법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다. 그것들은 제 몸과 자기 종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살고자 하는 것이다. _13~15쪽「쓰러질 때까지 모성애를 발휘하다」
감정을 강렬하게, 또 의식적으로 경험하는 길은 정말 인간의 길 한 가지밖에 없는 것일까? 진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다. 뇌가 정말로 조그만 새들이야말로 꼭 인간의 길이 아니어도 지능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공룡의 시대를 거친 후 공룡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조류의 진화는 우리와는 다른 방향을 택했다.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조류는 신피질이 없어도 고도의 정신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DVR(등쪽뇌실능선, dorsal ventricular ridge)이라 부르는 부위가 있어 우리의 대뇌피질과 비슷한 임무와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은 층층 구조인 인간의 신피질과 달리 새의 그것은 작은 덩어리이기 때문에 인간과 비슷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까마귀와 무리를 이루어 사는 다른 새들의 지적 능력이 영장류에 버금가거나 심지어 영장류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또한 동물의 감정과 관련해서는 학자들이 과도하게 조심스러운 논리를 펼치며, 명백한 정반대의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절대로 동물의 지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왜 그러는 것일까? 그냥 (그리고 올바르게) 잘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_44~45쪽「머리에서 불이 반짝반짝」
박새는 애벌레를 잡아먹어 유익하다. 고슴도치는 달팽이를 잡아먹어 유익하다. 달팽이는 채소를 갉아먹어 해롭다. 진딧물은 식물의 즙을 빨아 먹어 해롭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해충에겐 그것의 갈 길을 가로막는 유익한 곤충이 있다. 하지만 자연을 그런 식으로 나누려면 자동적으로 두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첫째 창조자의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정교하게 짜 맞추어 균형 있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설계도 말이다. 둘째 이 창조자는 세상을 완벽하게 인간의 욕구에 맞추어 만들었다. 이런 세계관에선 논리적으로 진드기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물론 나는 그것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자연 보호 협회조차 인공 새둥지를 만들어 인간에게 유익한 새를 도와주겠다는 주장을 퍼트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연을 정말로 그런 서랍에 억지로 끼워 넣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은 어떤 서랍에 들어가야 할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명력 넘치는 수백만 종의 생명체가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딱딱 아귀가 맞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정사정없이 모든 자원을 착취하는 너무나 이기적인 인간 종이 생태계를 파괴한 후 그 생태계와 그곳의 주민들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_81~82쪽「흑백」
벌들은 벌집 안에서 춤을 춰서 꽃꿀이 있는 곳과 그곳까지의 거리 정보를 제공하고 타액선의 즙을 꽃꿀에 첨가한 다음 그 혼합물을 작은 혓바닥에서 건조시켜 벌꿀로 가공한다. 또 밀랍을 분비하여 그것으로 벌집을 만든다. 학자들은 벌의 능력을 일찍부터 높이 평가했지만, 그렇게 작은 두뇌가 그와 같은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 모든 것을 일종의 초개체로 폄하했다. 그것들의 인지 능력도 집단 지성이라고 불렀다. 그런 초개체에선 모든 개체들이 열심히 협력하여 자신보다 훨씬 큰 신체의 능력을 발휘한다. 각 개체는 비교적 멍청하지만 다양한 과정의 협력과 환경 자극에 대한 반응 능력이 합쳐져서 이것들을 지성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식의 평가 방식은 개체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각 개체를 큰 건물의 석재, 퍼즐의 조각으로 축소시킨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란돌프 멘첼Randolf Menzel 교수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벌집 밖으로 처음 나온 어린 벌들이 태양을 일종의 나침반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이다. 벌은 태양을 이용하여 머릿속으로 집 주변의 지도를 그리고 그 지도에서 자신의 비행 항로를 찾아낸다. 한마디로 자기 주변이 어떤 모습인지를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머릿속 지도 덕분에 우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방향을 찾는다.… 그러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벌이 기억을 하고 고민을 해서 새 길을 개발했다고 말이다. 이런 경우 집단 지성은 별 도움이 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불러온 것은 그 벌의 작은 머리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다른 지성이다. 미래를 계획하고 아직 본 적 없는 것을 생각하며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몸을 인식함으로써 벌은 자신을 의식한다. 란돌프 멘첼의 말대로 “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집단이 필요치 않다. _100~103쪽「집단 지성」
나는 가치 있는 이타심은 진정한 선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돕기 위해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포기를 해야만 가치 있는 이타심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이 언제 그런 식의 이타심을 발휘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능이 높은 동물들을 살펴보면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새들이 바로 이런 동물이며, 실제로 새들에게선 꾸준히 희생의 장면이 목격된다. 예를 들어 박새는 천적이 다가오면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놈이 비명을 질러 경보를 발령한다. 그럼 다른 박새들이 얼른 몸을 숨겨 안전을 도모한다. 하지만 정작 비명을 지른 박새는 적의 관심을 끌게 되므로 위험에 처한다. 물론 녀석도 얼른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길 수 있겠지만 다른 박새들보다는 천적에게 붙들릴 위험이 매우 높다.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까?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언뜻 무의미한 짓 같기도 하다. 비명을 지른 새가 잡아먹히나 다른 새가 잡아먹히나 그 종 전체에게는 전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볼 때 이타심은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는 것이어서 희생정신이 크고 마음이 넓은 개체에게 다시 이익이 될 수 있다. _157~158쪽「이타심」
인간은 ‘시각의 동물’이다. 눈으로 보고 사냥을 한다. 따라서 사냥감이 될 수 있는 동물들은 어떻게 하든 인간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약 우리가 냄새를 맡고 사냥을 한다면 동물들은 진화를 거치면서 아마도 냄새를 잃었을 것이고, 우리가 소리를 듣고 사냥을 한다면 극도로 소리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으로 사냥을 하기에 동물들은 우리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낮에 조심을 한다. 어두워지면 인간은 거의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사냥감들이 활동을 밤으로 미루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우리도 노루와 사슴과 멧돼지가 밤에 활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녀석들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먹이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낮에는 으슥한 수풀이나 인적 드문 숲에서 먹이를 찾는다. 초지나 숲 가장자리에서 먹이를 찾는 것이 지극히 정상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인간들의 시야가 흐려지는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트인 곳으로 나온다.… 숲에서 일을 하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이라면 야생동물들이 경험을 수집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사냥 시설은 맛난 먹이가 잔뜩 널려 있는 곳에 서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사냥꾼들이 씨를 뿌려 사슴이나 노루가 좋아하는 풀을 키운다. 그런 ‘야생동물 풀밭’에서 키우는 풀을 두고 흔히 ‘야생동물 풀밭 찌개’라고 부른다.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돌지 않는가? 그래서 밤마다 룰렛 게임이 벌어진다. 주린 배가 이기면 노루와 사슴이 너무 이른 시각에 숲길로 나와 사냥꾼의 시야로 걸어간다. 공포가 이기면 녀석들이 주린 배를 안고 어둠이 내릴 때까지 참기 때문에 사냥꾼이 빈손으로 돌아간다. _210~212쪽「공포」
모든 동물 종이 세상을 다 다르게 보고 느낀다면 수십만 개의 다른 세상이 존재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이 중에서 많은 세상은 우리가 찾아 주기를 고대하며 우리 곁에 숨어 있다. 앞서 소개한 동물 종들 말고도 중부 유럽에는 너무 작고 매력이 없어서 아직 체계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동물이 수천 종이나 있다. 당연히 우리는 녀석들의 감정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우리가 눈여겨볼 만큼 중요한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녀석들에게 투자할 연구비도 없는 것이다. 녀석들의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며, 녀석들이 어떤 욕망을 품으며, 지금과 같은 상업적인 산림 경영으로 어떤 고통을 겪는지 알지 못하기에 누구도 녀석들을 위해 보호 구역을 지정할 뜻이 없는 것이다. _261쪽「낯선 세상」
우리는 보통 인간과 동물의 소통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종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려고만 든다. 상대편 동물이 우리의 개념이나 명령을 알아듣고,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으면 매우 지능이 높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사랑앵무, 까마귀, 코코 같은 고릴라가 질문에 우리의 언어로 대답이라도 하면 그야말로 감격하여 감탄사를 쏟아 낸다.
우리가 실제로 이 지구에서 가장 지적인 종이라면?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왜 과학은 정반대의 길을 걷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실험 동물에게 몇 년씩 힘들여 제스처를 가르칠까? 지금의 연구 수준에서 보면 우리보다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동물들에게 말이다. 우리가 동물의 언어를 배우는 쪽이 더 간단하지 않을까? 지금의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갖추었다. 예전에는 말과 똑같이 두 가지 음의 히히힝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가 우리의 관심사를 각각의 동물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방향으로 진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_283쪽「마음을 전하다」
우리는 다른 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진화해 왔기에 그들과 싸우고 그들과 더불어 생존해야 했다. 단연코 늑대와 곰, 야생마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낯선 인간의 얼굴을 해독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육감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고 개나 고양이의 행동에 너무 과도한 감정이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본능은 옳다. 그렇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과학적 연구 결과들은 놀라운 발견이 아니다. 그저 여태 우리가 동물을 향해 품었던 감정들을 재확인하는 차원일 뿐이다.
동물의 감정을 부인하는 목소리에서 나는 희미하게나마 약간의 불안을 감지한다. 인간의 특별한 지위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이다. 나아가 동물의 이용이 어려워질 것이며 밥을 먹을 때마다, 가죽옷을 입을 때마다 도덕적 죄의식으로 마음이 어두워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새끼를 교육시키고, 심지어 새끼의 산파 노릇까지 하고, 이름을 알아듣고, 거울 테스트에 합격하는 예민한 돼지를 생각하면 유럽연합에서 도살하는 돼지만 따져도 2500만여 마리에 이르는 현실에 어찌 소름이 돋지 않겠는가. _292~293쪽「나가는 글: 한 걸음 뒤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