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란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나 산업화 시대의 발전주의가 선보인 것과 같은 강력하고 절대적인 적대가 제거된 시대에 어떤 집단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등장한 타자화의 정동이자 매우 적극적인 ‘주체화의 열정’을 반영하고 있는 정동이다. 왜 바로 이 시대에 혐오여야 하는가는 다양한 역사적 계기들의 상관관계 속에서 아주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셈이다.
그랬을 때 복고적 반동주의를 통해 혐오와 차별을 양산하는 이들에게 여성, 성소수자, 종북,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호남 등 사회적 소수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혐오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감정이고, 이때 차별의 주체들은 한국 사회의 주류 혹은 기득권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편화되고 데이터화 되었으면서도 강력한 향수로서 거대 서사가 여전히 의식의 심층에 존재할 때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미래라는 형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혐오란 나 자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부분에 대한 거부반응이며 그런 ‘상상적인’ 기득권 남성 주체 외부에 존재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 p.36~37
포스트페미니즘은 이 시대를 견뎌낼 판타지를 여성들에게 제공했다. “한 손에는 통장을”이 의미 있는 구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본은 여성들에게 해방의 공간을 열어주었지만, 또다시 자본은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순들을 생산해냈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이미 ‘유연한 노동력’이었던 여성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유동하는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동시에 그런 노동시장의 공백들을 메우는 구성원으로 적극적으로 포섭되었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여성들이 그 공백에 진입하려면 무엇을 자원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렇게 각자도생의 삶의 조건에 적응해 나갔을 때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전시한다. 페미니즘의 풍부한 논의는 사회가 원하는 가치들 안에서 단순화되고, 전복적이거나 위험한 상상력은 손쉽게 거세된다. 그러면서 포스트페미니즘의 상상력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유리 천장을 뚫은 소수의 여성들을 재현의 장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여성들에게는 ‘희망’을, 사회적으로는 ‘역차별’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 p.81
페미니스트 문화연구와 파퓰러 페미니즘이 투쟁해온 것은 남성으로 젠더화된 대중의 개념에 여성을 기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시에 ‘여성화된 것’이라는 ‘낙인’과 함께 가치 절하되었던 대중성/통속성 안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렇게 대중성/통속성은 ‘보편 정치’의 의미를 새롭게 구성한다. 이때 정치란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세계를 결정짓는 매우 구체적인 일상의 정치로 조정된다.
하지만 팽크허스트의 기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그리고 앞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대중성/통속성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지만 자동적으로 우리를 해방시켜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이를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성/통속성은 성적 앙시앵레짐의 외부를 상상할 수 있는 것으로 재발견되어야 한다. 외부를 상상하지 못한 채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로만 존재한다면 계속해서 절반의 실패를 담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깊이 있게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완전히 가부장체제적으로 구성되는 ‘욕망’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다. --- p.113~114
김홍준은 “우리가,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자 말자”라는 영화 [생활의 발견]--- p.2002) 대사의 감수성이 “분명히 386 세대적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386 세대가 자신들의 청춘이 끝나고 도래한 새로운 시대 속에서 공통으로 체험하는 어떤 세계 감정을 예리하게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대사에서 ‘인간’은 민주화를 이룩했고 가장 풍요로운 사회를 살았다는 나르시시즘을 반영하고, ‘괴물’이란 결국 그들이 1990년대 소비자본주의 시대를 거쳐 2000년대에 적극적으로 맞이했던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느껴야 했던 죄책감과 수치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문재인이 집권했을 때, 그들은 이 복잡한 감정을 사유를 결여한 자긍심으로 뭉쳐냈다. 이들이 [나꼼수] 열풍과 문빠 현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곱씹어볼 만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386 세대만이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현실에 한국 사회의 민낯이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 민낯이란, 안타깝게도 여전히, 아버지가 되지 못해 서운한 짐승, ‘386 아재들’의 얼굴이다. --- p.158
폭력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소리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처절한 ‘비명’만이 고통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처절함에 대한 페티시에 사로잡혀 있는가. 폭력을 볼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피해자를 또다시 대상화하고 물신화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미하엘 하네케--- p.Michael Haneke) 감독의 말처럼,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