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8세기에 나온 함무라비 법전 108조에는 술집 주인이 맥줏값으로 곡물 대신 더 많은 무게의 은을 받거나 곡물 가치에 비해 적은 양의 맥주를 빚으면 잡아가 물에 던진다고 적혀 있다. 포도주를 마시는 곳에 시와 철학이 있었다면, 맥주를 권하고 마시는 곳에는 거사가 함께했다. 그래서 함무라비 법전의 그다음 조항인 109조에는 자기 술집에 모여 음모를 꾸민 반역자들을 체포해 궁으로 데려가지 않은 술집 주인은 똑같이 사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 --- p.11
성 갈렌 수도원은 아일랜드 전통을 따랐으며, 당연히 맥주 양조에도 큰 공을 들였다. 수도원의 설계도를 보면 곡물 창고, 곡물 건조장, 방앗간, 맥아용 곡물 창고와 일반 곡물 창고는 물론 양조장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양조한 맥주는 지하실에 저장했다. 양조장은 무려 세 곳이나 되었는데, 많은 수도원이 성 갈렌 수도원을 따라 세 군데씩 양조장을 만들었다. 제일 큰 양조장에서는 수도원에서 자체적으로 소비할 맥주를 만들었고, 두 번째 양조장에서는 귀한 손님에게 드릴 맥주를, 세 번째 양조장에서는 순례자나 거지들에게 나누어 줄 맥주를 빚었다. 세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가 어떻게 다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설계도에 여과실이 따로 있는 곳은 첫 번째 양조장뿐이다. 제일 좋은 맥주를 수도사들의 몫으로 할당했던 것 같다. ‘맥주와 교회의 동맹’ 중에서 --- p.24
시대를 막론하고 맥주 양조업자들은 깨끗한 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 실험실의 화학자나 되어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미량 불순물만 섞여도 그 우물이나 샘물로 만든 맥주는 불순물의 뒷맛을 남기는 법이다. 그러니 물이 깨끗할수록 그 물로 만든 맥주도 잘 팔렸다. 양조 공정을 모두 지켜 허브를 끓이고 당시로써는 정말로 깨끗한 통에 담아 발효시킨 데다 홉의 쓴맛과 알코올이 박테리아의 성장을 억제하니, 맥주는 안전한 음료였다.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물과 비교하면 무균 상태나 진배없었다. 박테리아와 미생물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옛날 사람들도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물을 마시는 사람보다 더 건강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았다. 따라서 부대 이동 계획을 세우거나 군사 작전을 짜는 사령관들은 당연히 해당 지역에 맥주 저장고가 있는지를 열심히 따졌다. ‘30년 전쟁의 승리를 이끈 우어 크로스티처’ 중에서 --- p.65
중세 말부터 유럽 대도시에서는 맥주 양조가 점차 길드 조합원의 특권 사업이 되었다. 북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도 마찬가지였다. 몇백 년 동안 대규모 길드의 조합원에게만 맥주 양조권이 주어졌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접어들어 이들과 경쟁하는 소규모 길드들이 이 같은 독점권을 맹비난하면서 양조 권리를 요구했다. 길드 간의 알력에 신물이 난 러시아 정부는 1783년, 대규모 행정 개혁의 한 방편으로 솔로몬의 판결을 내렸다. 즉, 양쪽 길드 모두에게서 맥주 거래의 독점권을 박탈한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맥주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은 과부나 고아 및 달리 생계비를 마련할 방도가 없는 빈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못 박았다. ‘맥주, 과부와 고아들을 구제하다’ 중에서 --- p.85
산델스의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1마일 밖의 토이발라는 상황이 훨씬 좋았다. 장교들이 마시는 외국산 술이 창고에 넉넉했다. 그런데도 산델스는 병사들이 마시는 맥주를 마셨다. 사보의 예거 부대가 그를 믿고 따랐던 데는 이런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사령관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며 같은 술을 마신다는 생각에 신뢰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군 보급 식량은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해 소금을 많이 넣기 때문에 먹고 나면 당연히 목이 말랐다. 따라서 스웨덴군이 정한 병사한 명당 하루 맥주 공급량은 최소 한 단지(2.5리터)였다. ‘미식가 장교’ 중에서 --- p.103
파스퇴르의 발견 덕분에 프랑스 맥주의 일반적인 품질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을 무찌르겠다던 원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전보다 위생적인 발효 과정과 파스퇴르 공법 덕분에 맥주가 변질되는 일은 훨씬 줄었지만, 그런 기술이 자동으로 최고의 제품을 낳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맥주를 만들려면 과학 말고도 마법이 필요한 법이다. 파스퇴르의 동료이자 친구인 피에르 오귀스트 베르탱은 입만 열었다 하면 미생물 타령인 파스퇴르에게 질려 이렇게 불평했다고 한다. “미생물 연설은 괜찮은 맥주부터 만들어 준 다음에나 하시지.”‘ 루이 파스퇴르의 맥주 연구’ 중에서 --- p.129
폰 시너 대위가 깍듯하게 예법을 차린 이유는 어쩌면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웨일스 연대 소속 병사 프랭크 리처즈는 그날 마신 맥주의 품질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 프랑스 맥주는 썩은 맛이 났지만, 우리는 두 통을 싹 비웠다.” 그 두 통의 맥주는 독일 측 전선에서 멀지 않은 프렐링헨의 양조장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맥주에 대한 오해를 피하고자 프랑스 맥주가 원래 그렇게 썩은 맛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은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다만 그 맥주는 제조하자마자 바로 마셔야 하는 상면발효 맥주인데, 그것을 몇 달 동안이나 습기 많은 참호에 놓아두었으니 상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발사 중지! 맥주를 가져 왔다’ 중에서 --- p.165
히틀러의 맥주 취향이나 그 밖의 선호도에 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알려진 것이 적다. 뮌헨 시절 친구였던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히틀러가 종종 흑맥주 한 잔을 마셨다고 했다. 하지만 1924년의 반역죄 재판에서 그는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으며, 목이 마를 때 물이나 맥주 한 모금 정도 마시는 것이 전부라고 주장했다. 나치스는 초기에 히틀러를 건강한 채식주의자이며 광천수 애호가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금욕적 이미지는 나치스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만들어낸 것으로, 사실과 달랐다. 바이에른의 농촌에 자리 잡은 홀츠키르히너 오베르브로이 양조장은 히틀러만을 위해 특별한 맥주를 만들어 공급했다. 알코올 함량이 2퍼센트 미만인 라거 흑맥주였다. 영국 정보부도 이 사실을 알고서 1944년에 폭슬리 작전의 하나로 맥주에 독을 타서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비어할레의 선동가’ 중에서 --- p.182
너무 많이 마시지만 않는다면 맥주는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고도 원기를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좋은 음료였다. 하지만 1935년 투르 드 프랑스의 17구간에서는 안타깝게도 맥주가 부작용을 일으켰다. 맥주 탓에 일시적으로 선수들의 집중력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선수들이 오아시스라도 본 양 넋을 잃고 맥주 테이블을 쳐다볼 동안 프랑스 선수 쥘리앵 무아노는 아무도 모르게 선두 그룹에서 빠져나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몇몇 선수가 맥주를 마신 다음에도 윗옷 주머니에 맥주병을 챙겨 넣는 통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져서 선수들은 시간을 더 허비했다. 자전거가 넘어지기도 했고, 핸들이 돌아가 프레임과 얽히기도 했다. 마침내 다른 선수들이 간신히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 무아노는 벌써 한참 앞서서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다. 그는 팬에게 음료를 얻어 마시고서 점점 더 선두 그룹과 차이를 벌려 7시간 36분 30초 만에 홀로 보르도의 결승선을 넘었다. 선두 그룹은 15분 33초 뒤에야 결승점에 도착했다. 1929년 이후 투르 드 프랑스 역사상 단일 구간 시간 격차 중 최대였다. ‘투르 드 프랑스와 맥주’ 중에서 --- p.202
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도,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도, 찰스 윌리엄스의 정통 판타지 소설 《모든 성령의 날 전야》도 그 펍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루이스는 회고록에서 잉클링스 모임의 토론과 비평이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구상했던 판타지 세상의 이야기도 이 시기에 작업에 들어갔다. 그 소설이 바로 1950~1956년에 출간된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였다. 루이스의 회상을 들어 보면 톨킨은 남들의 비판에 초연했다고 한다. 하지만 침착한 행동과 겸양이 몸에 밴 그도 가끔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여 고대 영어를 지껄였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톨킨 역시 회원들의 비평을 흘려듣지는 못했다. 그는 《반지의 제왕》에 들어갈 에필로그를 두 가지 버전으로 집필했는데, 잉클링스의 비판을 듣고 고심 끝에 삭제해 버렸다. 훗날 톨킨은 그 결정을 후회했다. 에필로그의 한 가지 버전은 아들 크리스토퍼가 편집한 작품 모음집 《중간계의 역사》에 수록되었다. ‘옥스퍼드 펍의 단골 문인들’ 중에서 --- p.212
바닥이 울퉁불퉁하거나 폭격으로 움푹 팼거나 비행기가 급정거하는 경우 랜딩 스키드가 손상되어 통이 바닥에 닿았다. 맥주 한 통에는 18갤런이 들어가고 1갤런은 8파인트이니, 통이 하나 부서지면 144파인트가 활주로에 쏟아진다. 그런 불상사를 일으킨 조종사는 한 주 내내 지청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주가 지나면 다시 본토의 기지로 점검하러 간 비행기가 맥주를 매달고 돌아오고, 남은 조종사들은 성공을 기원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착륙 장면을 지켜보았다. 영국 공군 유일의 아이슬란드인 전투기 조종사였고 훗날 제2대 국제 연합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의 조종사가 된 토니 존슨은 이렇게 회상했다. “스핏파이어가 맥주를 가득 채운 통 두 개를 날개 밑에 매달고 영국에서 돌아오던 1944년의 노르망디처럼 그렇게 전투기 착륙을 꼼꼼히 관찰하고 평가했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맥주, 전투기 타고 해협을 건너다’ 중에서 --- p.227
1950년대 이탈리아 국민의 맥주 사랑은 광고가 일깨운 것이었다. 초기 광고는 누가 봐도 가르치는 식이었다. 맥주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어울린다는 점을 환기하고, ‘무더운 여름은 물론이고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장보기 목록에 매일’ 맥주가 들어간다는 광고 문구도 있었다. 광고 모델로는 당대 최고 스타를 발탁했다. 영화 [달콤한 인생] 1960으로 시대의 아이콘이 된 아니타 에크베르그를 모델로 삼은 적도 있었다. 이제 ‘맥주’ 하면 모두가 모던함과 도시를 떠올렸고, 나아가 진보를 연상했다. 광고는 효력을 발휘했다. 1958~1963년 사이에 페로니의 매출은 두 배로 뛰었다. 다른 회사의 맥주도 많이 팔렸는데, 어찌나 수요가 많았는지 생산이 미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아메리칸 드림’ 중에서 --- p.236
폴란드 맥주 애호가당은 자기들끼리의 농담으로 시작되었다. [비어 스카우트] 출연진의 아이디어가 잡지 [판Pan]의 편집진 귀에 들어갔고, 편집장 아담 할베르가 그것을 조금 더 구체화했다. 그는 반은 재미로, 반은 진지하게 당의 정강을 만들었는데 이런 구절도 있었다. “당원은 맥주 문화가 좋아지도록, 정당 수뇌부는 더 좋아지도록 최선을 다한다. 우리에게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품질 좋은 맥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제대로 된 맥줏집이 필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오데르, 비스툴라, 버그 강변의 저급한 보드카 문화는 맥주를 즐기는 문화로 바뀔 것이다.”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 정당’ 중에서 --- p.257
국제 축구 연맹(FIFA)은 오랫동안 AB 인베브 그룹과 협력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런데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이 다가오면서 협력에 차질이 생겼다. 축구 경기장에서 술 판매와 소비를 금지하는 브라질의 법안 때문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브라질에서 열린 모든 국제 대회나 리그 경기에서 맥주 판매가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FIFA는 브라질에 압력을 가했고, 결국 2012년에 브라질은 손을 들었다. 특별법을 제정해 2013년 컨페더레이션컵과 2014년 월드컵 대회에서는 맥주를, 더 정확히 말하면 버드와이저를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FC 하이네켄 vs AB 인베브 유나이티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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