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사회란 국가와는 다른 무엇이며, 국가 그 이상을 의미한다. 사회학자들에게 사회질서는 국가 질서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학의 관점에서 정치는 사회의 부분 영역일 뿐 반드시 사회의 중심이거나 선두인 것은 아니며, 사회 변화가 정치적 행위의 결과이듯 정치발전은 기껏해야 사회변동의 결과이다. 예컨대 사회계약론은 정치사상사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지만, 적어도 사회학의 시각에서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다. 사회란 결코 주권적 행위자들 간의 의결과 합의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이론 형성은 종합-동학-실천,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발전하며, 이러한 세 가지 모든 측면에서 몸소 체험된 근대화 과정에 대한 반응이자 성찰이다. --- p. 20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그리고 노동과 더불어 외적 자연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노동과정에서 각각의 조건에 따라 사회관계도 거듭 변형시키고 개혁한다. 또한 인간은 노동의 재료를 다루면서 서서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존재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존재는 한순간에 최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유적(類的) 존재’가 완전하게 실현될 때까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비로소 발전한다. 이러한 확신은 ‘내가 노동을 하듯이, 그렇게 나는 존재한다’라고 요약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맑스는 『자본론』 1장에서 자연을 인류의 어머니, 그러나 노동은 인류의 아버지로 명명해 표현하고 있다. --- p. 44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학문, 경제, 법체계, 또는 정치와 같은 근대적 기능체계 중 어떤 것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물음에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합리화 과정이 우리가 세계를 예측·지배하게 만든 것만은 아니다. 베버에 따르면 합리화 과정은 주술적이며, 설명이 불가능하고, 베일에 싸인 채 일상의 경험에서 벗어나는 모든 순간을 제거함으로써 세계를 ‘탈주술화’하기도 했다.
--- p. 79
뒤르켐은 분업에서 자신이 사회학의 핵심이라고 이해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열쇠를 찾아낼 것으로 추정했다. 그 문제는 근대사회의 통합이다. 그는 구조적 분화의 분업적 형태가 개인들의 개별성과 사회통합을 동시에 증대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뒤르켐은 분업이 문명적 진보를 유도한다는 전통적 설명을 우선적으로 거부한다. 그가 볼 때 그러한 설명은 결코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분업의 경제적 효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상호작용 관계를 규정하고 그들 간 연대관계를 공고히 하는 분업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 p. 100
본래의 중간 목적들(교육, 돈벌이) 중 다수가 오늘날에는 최종 목적이 되어버렸다―그리고 반대 현상들도 나타난다. 짐멜에 따르면, 이를 통해 심지어 대상 세계, 즉 우리 주변에 있는 물질적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도 변화한다. 소도시 주민이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개인적 추억(마르타 고모의 목각상자, 할아버지의 주말농장, 여러 번 직접 수리한 자가용 등)이 담긴 질적 관계를 쌓아가는 경향을 보였다면, 근대 도시인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계산적인 양적 태도(이 장롱은 세일 가격에 구입했다, 주말농장은 오늘날 더 이상의 가치가 없다, 자가용은 2년마다 교체한다 등)를 취한다. --- p. 128
예술은 자본주의적 가치화 과정에서 하나의 상품일 뿐만 아니라, 도구적 합리성의 지배하에서 기존의 것의 재생산에 관계되지 않는 모든 내용을 비웠다. “문화는 오늘날 모든 것을 유사하게 만든다. 영화, 라디오, 잡지는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각 부문은 한 목소리이고, 모든 것이 그 안에 함께 어우러져 있다.” 발전된 근대에서 문화 향유는 여가 시간의 오락으로 저하되며, 노동능력의 재생에 기여한다. 이로써 체계는 닫힌다. 현대사회를 총체적 체계로서 특징짓는 것은 단연 아도르노의 시대 진단의 핵심이다. --- p. 156
기술적 효율성이 합리성의 유일한 척도가 되면 우리가 원하는 것에 관한 상호이해는 불필요해진다. 그렇게 되면 계산되지 않는 것은 토론의 가치가 없는 것이 된다. 만약 합리화가 객관적 세계와 관련된 진리의 문제라는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도덕적인 것과 미학적인 것의 차원에서도 진행된다는 의식이 일상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근대의 프로젝트는 체계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행사하는 압력에 굴복하게 된다. --- p. 185
파슨스는 근대화에 대해서 처음부터 특정 목표를 향해 진행되지는 않는 진화적 과정으로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특정 발전 단계들은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한 발전 단계들과 결부된 진화상 이점이 크기 때문에 일단 그 수준에 도달하면 어떤 사회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단계들이 완료된 사회는 그렇지 못한 다른 사회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파슨스는 이러한 발전 단계들을 ‘진화상 보편’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그는 근대화 과정을 진화상 보편의 확립을 통해 순차적으로 구축되는 단계들의 결과로 구상한다. --- p. 210
루만에게 중요한 것은 구유럽적 전통에 의해 결정된 일상적인 언어 사용의 습관들을 깨뜨리는 사회학적 개념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개념적 구상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루만이 수학에 거듭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를 통해 근대사회에 대한 향상된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회적으로 잘못된 어떤 발전의 위험이 임박해 있는가라는 문제에서 이론은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 이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이론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근대의 가장 시급한 병리에 관한 결정을 완전히 위임하지 않는다. 기능적 분화에 대한 이론은 우리에게 적어도 몇 가지 가능한 문제들을 암시한다. --- p. 242
자기강제란 개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며, 폭력 및 직접적인 감정 폭발을 억제하고, 공손·시간 엄수·예의범절의 행동 규칙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내적 동기[아비투스(Habitus)]에 의해 준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지위는 신중한 예측·타산·계획을 통해 규정되며, 더 이상 투쟁에 기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감정 및 충동의 통제는 수치심과 당혹감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나타난다. 즉, 우리는 좋은 관습을 지키지 않거나 순간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 때 수치심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할 경우 당혹스러워한다. 근대화 과정의 특징은 우리가 수치심을 느낄 수밖에 없거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들이 증가한다는 것에 있다. --- p. 265
라투르의 견해에 따르면 자연적 사실들은 전략적으로 탈정치화된다. 자연적 사실들은 토론·흥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문외한들’이 굴복해야 할 객관적 인식에 대한 특권적 접근을 요구하는 전문가들의 지배를 고착시킨다. 따라서 과학과 정치의 분리,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현실의 분리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이다. 이는 철회할 수 있는 ‘합의’이다. 따라서 라투르는 정치생태학에 대한 자신의 구상에서, 하이브리드와 단순한 자연적 사물들도 발언하고 이해 관심을 주장하는 ‘사물의 의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한다. --- p. 296
합리적 선택이론은 어떻게, 또는 어째서 사회질서가 합리적 행위자들의 행위와 계산에 의해 형성되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즉, 효용극대화를 목표로 할 경우, 행위자들은 반드시 사회적 조정과 협동의 보장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조정에 대한 관습과 규범(‘우측 차량 우선’ 또는 ‘아동 우선’ 등)을 만들어내는 사회제도가 형성되며, 긍정적인 자극(특별 수당, 감세 및 보상 등)이나 부정적 제재(처벌, 가중처벌, 세금 부과 등)를 통해 협력에 의한 행동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무임승차를 예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합리적 행위자들이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는 인위적 형성체이다. --- p. 320
새로운 지구적 세계 질서가 더 이상 외부 경계와 내부 분화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권력과 지배의 효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며, 따라서 저항의 잠재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자본 증식의 압박은 사람들의 행위를 외적으로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요구의 아주 특정한 형태들을 (조작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내적으로도 규정한다. --- p. 340
억압적 권력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억압적 권력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존재하며, 저항의 대상이 되기 쉽다. 반면에 생산적 권력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작동하며 총체적이다. 우리의 생각·말·행위가 자율적 의지에서가 아니라 생산적 권력의 개인화와 총체화의 효과로 나타날 때, 중앙집권화된 억압적 권력의 퇴보와 우리가 오늘날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며 행한다는 사실은 덜 자유롭게 다가온다.
--- p. 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