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고 색다른 환경은 사고의 전환과 흥분, 해방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는 동시에 딱 그만큼의 두려움이 매일 밤 다른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다름에서 비롯된 차이를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에 나는 이미 바위처럼 단단히 굳어 있는 사람이었다. 매순간 부딪쳤고, 아팠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 미세한 변화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앞으로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지난한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보다 만족스러운 나로 변모해 있을 것이라 기대할 뿐이었다.
프롤로그, 5~6p
캠프힐에서는 장애인을 빌리저villager 또는 레지던트resident라고 부른다. 의미 그대로 마을의 주민인 것이다. 토마스, 헬렌, 안나, 크리스틴. 카인은 한 사람씩 이름을 짚어가며 각자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들려주었다. 이들과 한 팀을 이루기 전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할 내용들이었다. 가족 관계라든가 나이, 참여하는 워크숍. 그리고 이들이 지닌 개별적인 장애에 관해서. 의학 용어에 미숙한 나를 위해 카인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명확하게 단어를 발음하고 설명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또한 반복해서 확인했다.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이 절차는 두툼한 서류 뭉치에 모두 꼼꼼히 기록됐다. 자리를 비운 빌리저들과 곧장 인사를 나눌 수는 없었다. 카인이 들려준 간략한 묘사에 기대어 그들을 상상해 보았지만 그럴수록 실체는 더욱 의뭉스러웠다. 마치 구술로 전해 내려오는 설화 속 주인공들처럼 점점 흐릿한 안개 속에 숨어들었다. 애꿎은 상상력은 접어둔 채 아직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불러보았다. 마음이 벌써부터 애틋해졌다.
Episode 3.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36~37p
바지런히 바닥을 쓸고 옷깃을 다리다가도 티타임이 되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물을 끓였다. 오븐에 넣어둔 브라우니와 썰다 만 오이를 내버려둔 채 테이블 앞에 모여드는 것이다. 안쪽 가장자리가 검붉게 물든 투박한 머그잔에 홍차 티백을 우리고, 취향껏 우유를 부었다. 한쪽에선 달콤한 쿠키 상자가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그렇게 하루에 두 번. 우리는 째깍째깍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잠시 세워두었다.
30분간의 티타임을 즐기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폴폴 김이 오르는 잔을 앞에 두고 피로를 털어내는 사람, 바깥의 벤치에 누워 식물처럼 볕을 쬐는 사람, 지난밤의 작은 사건 사고를 조간신문처럼 종알종알 전하는 사람. 찻물이 서서히 식는 동안 우리 모두 ‘작지만 확실한’ 휴식을 누렸다.
‘찻잎을 우리는 동안’ , 92p
침대에 걸터앉은 안나가 내게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앨범이었다. 뜬금없는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페이지를 넘기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투명한 접착 비닐 아래 보관된 사진 속 주인공은 젊은 시절의 안나였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깊은 눈매와 보조개가 팬 미소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안나와의 대화는 수신이 약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 닮았다. 귀를 바짝 세운 채 슬금슬금 다이얼을 돌리다 보면 흐릿했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진다. 물론 안나는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대신 자신의 방식대로 신호를 쏘아 보냈다. 그렇게 우리는 몇 가지 무언의 신호를 공유했다. 하지만 목소리로 전달되는 의사소통에 익숙한 나는 한동안 그 사인을 놓치거나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Episode 19 나는 말하고, 그녀는 쓴다, 162, 165p
대기 줄의 끝자락에 서 있는 내 뒤로 마그다가 따라 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일하는 워크숍이 다르면 좀처럼 만나기가 어려운 게 코워커 사이였다. 마침 마주친 김에 오늘 밤 술자리에 올 것인지 물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방에서 쉬려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어. 안티 소셜 상태랄까. 요즘이 그래.”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멍했다.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인생의 문장을 마주했을 때처럼, 내 심정을 정확히 대변한 마그다의 말은 심심한 위로 그 이상이었다. 아차 싶었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녀와 달리 나는 속내를 감추고 숨기는 데 늘 골몰했다. 스스로를 안티 소셜이라 비꼬는 그 당당함이 이상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마그다를 더욱 이해하고 싶어졌다.
서둘러 다가오면 뒷걸음치는 사람, 가끔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 고독한 시간만큼 함께하는 순간 또한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게 바로 나라는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Episode 21 다른 무엇도 아닌 나
눈을 껌뻑이는 소들을 향해 노래를 불러주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니. 이따금씩 그들이 보여주는 이런 작은 마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노래가 끝난 뒤 하우스패런츠 대니가 스피치를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All the difference are here.”
저마다 다른 이들이 지금 이곳에 함께 있다는 말. 그 자명한 사실이 새삼스러워 나는 홀로 감격에 겨웠다. 지금처럼 엉터리인 채로 살아도 얼마든지 괜찮다는 것을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유난히 키가 작은 사람과 유난히 키가 큰 사람, 혼자 있을 때 더욱 편안한 사람, 말이 없는 사람,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사람,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사람. 그 모두가 여기 함께, 그리고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
Episode 27. 달라서 아름다운 사람들, 239p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