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다. 소벌공이 그곳에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만 남아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어린아이가 나왔고, 소벌공은 그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다. 혁거세의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夙成)했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다고 존경해오다가, 이때 그를 임금으로 추대했다. 진한 사람들[진인辰人]은 박[호瓠]을 박(朴)이라 불렀는데, 혁거세가 깨고 나온 큰 알이 마치 박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그의 성(姓)을 박(朴)으로 삼았다. (……) 혁거세가 즉위한 후 『삼국사기』에 맨 처음 나오는 기록이, 기원전 54년(혁거세 4) 4월 초하루에 “일식(日食)이 있었다”는 간단한 내용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기원전 53년(혁거세 5) 정월에 알영(閼英)을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이에 이어 알영의 탄생 설화가 나온다.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이를 보고 이상히 여긴 어떤 할멈[노구老?]이 거두어 키웠다. 이때 주워다 키운 여자아이의 이름은 우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고, 혁거세가 이를 듣고서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행실이 어질고 보필을 잘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두 성인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 p.10~11
미해를 잡지 못한 왜왕은 제상을 가두어두고 미해를 탈출시킨 이유를 물었다. 제상은 “계림의 신하인 나는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어주려 했을 뿐”이라 답했고, 이를 들은 왜왕은 노했다. 그러면서 “나의 신하가 되어서 감히 계림의 신하라고 하니, 다섯 가지 형벌[오형五刑: 피부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넣는 벌, 코를 베는 벌, 발뒤꿈치를 베는 벌, 불알을 없애는 벌, 목을 베어 죽이는 벌]을 모두 줄 것”이라고 위협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기회를 주었다.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을 한다면 후한 녹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며 거절했고, 화가 난 왜왕은 제상의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했다. 그래서 재상의 피 때문에 지금도 갈대에서 붉은 빛깔이 난다고 해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누구의 신하인지를 물었다. 그래도 “계림의 신하”라는 답이 나오자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세워놓고 또 물었지만, 같은 답이 나오자 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깨달았다. 왜왕은 곧바로 목도라는 섬에서 제상을 불 태워 죽였다. --- p.146
신라 왕으로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次次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었다” (……)
503년(지증 4) 10월에는 나라 이름에 대한 신하들의 건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래 나라 이름[국호國號]이 확정되지 않아 사라(斯羅)?사로(斯盧)?신라(新羅) 등이 뒤섞여서 쓰인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의 신(新)과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의 라(羅)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였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예부터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독자적인 칭호를 써왔지만, 이제는 신라국왕(新羅國王)을 쓰자”는 건의도 올렸다. 지증은 이 건의 를 받아들였다. 지증의 즉위년에 통치자의 칭호에 관한 사론 을 굳이 붙여놓은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 p.180~181
512년(지증 13) 6월, 우산국(于山國)을 복속시켜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도록 했다. 당시부터 울릉도(鬱陵島)라고도 불렸던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 바다에 있는 섬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방 100리의 면적을 가진 이 섬사람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신라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를 굴복시킨 인물이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로 부임했던 이찬 이사부 (異斯夫)였다. 그는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려우나 꾀로는 복속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사부는 “너희가 만 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허풍을 쳤다. 여기 넘어간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항복했다 한다.
---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