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신라에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도입했던 시기가 법흥왕 때였음은 분명하다. 이때 왕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이런저런 불평을 많이 하여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 또는 처도處道)이 제안을 하나 했다. 자신의 목을 베어 반대 여론을 꺾어버리라는 것이다. 법흥왕은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면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며 반대했으나, “도를 이룰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이차돈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렇게 이차돈과 시나리오를 짜놓은 법흥왕은 신하들을 불러 불교 도입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물론 신하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 정상적인 도(道)가 아니다. 이를 방치하면 후회할 것이다.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명을 받들지 못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그러자 이차돈이 나섰다. “이는 잘못된 논리다.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교가 심오하여 도를 이룰 수 있다 하니, 믿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법흥왕은 미리 짜놓은 대로 이차돈을 나무랐다. “여론이 기울었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어쩔 수 없다”며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했던 것이다. 이차돈은 처형당하기 전, 예언 하나를 남겼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에게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의 목을 베자, 과연 목이 잘린 곳에서 우윳빛처럼 하얀 피가 솟구쳤다. --- p.14~15
550년(진흥왕 11)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진흥왕은 거듭되는 공방전에 양이 지친 틈을 이용해, 이찬 이사부가 지휘하는 병력을 통해 이 두 성을 빼앗았다. 그리고 이 성들을 보강하고 군사 1,000명을 방어 병력으로 배치했다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좀 의문이 있다. 바로 다음 해 신라는 백제와 협력하여 한강 지역을 빼앗는 연합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백제가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성을 신라에 빼앗겼다면 1년도 안되어 고구려를 협공하는 연합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나 배경에 왜곡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 p.22~23
당나라 군대와 따로 출발한 신라군은 7월 9일, 황산(黃山) 벌판까지 진군했다. 이때 백제 장군 계백(?伯)의 부대가 먼저 험한 곳 세 군데에 진영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을 지휘관으로 하는 신라군은 네 번이나 세 군데 요충지를 돌파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다.
이 상황에서 신라군은 사기를 올리기 위해 즐겨 쓰는 수법을 사용했다. 먼저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을 적진으로 돌격시켜 전사하게 했고, 뒤이어 좌장군 품일도 아들 관장(官狀: 또는 관창官昌)을 내몰았다. 관장이 처음에는 생포되었다가, 계백이 돌려보내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가 싸우다 전사했다. 이렇게 해서 사기를 회복시킨 신라군이 백제군을 격파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계백은 전사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 p.116
7월 16일에 한성에 도착한 문무왕은, 여러 총관들에게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이후의 작전에 참여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후 김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격파했고, 9월 21일에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을 보내 이적에게 항복을 청했다. 항복을 받은 이적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가 영공을 따라 당으로 가며,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이들을 수행했다. 한성을 출발하여 평양으로 향하다가 힐차양(?次壤)에 이르러 고구려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문무왕은, 당나라 장수들이 이미 돌아갔다는 보고를 듣고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 p.167
2월 21일, 문무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교서를 내렸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고생하던 신라를 위해 선왕(김춘추)께서는 바다를 건너 중국에 군사를 청하셨다. 백제는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멸망시키지 못하고 돌아가신 선왕의 유업(遺業)을 과인이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이 편안해졌다. 전쟁터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었고, 싸우다 죽은 혼령들에게는 명복 빌 재물을 주었지만, 옥에 갇혀있는 죄인은 불쌍히 여겨 울어주던 은혜[읍고泣辜]를 받지 못한 고로 사면령을 내린다. 총장(總章) 2년, 669년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五逆)의 죄를 범하여 사형을 받은 죄목 이외에는 모두 석방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 p.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