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지니는 신비다. 한 나라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하나님의 통치는 이렇듯 신비롭다. 크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분은 참으로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 방식이 아니라 그분 방식대로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사 55:8). 하나님은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는 않지만, 그분의 길과 성품, 그분의 뜻과 변함없는 신실하심에 대한 충분한 통찰을 자기 백성에게 주신다. 그래서 시대가 아무리 어두울지라도, 그 백성은 믿음으로 살고 소망으로 힘을 얻을 수 있다.…출애굽기는 뛰어난 예술성으로 기록된 책이다. 출애굽기는 바로를 위해 국고성들을 건설하는 노예 민족의 모습으로 시작해서(1:11) 똑같은 백성이 이제는 해방되어 자신들의 하나님이 거하실 장막을 건축하는 모습으로 끝난다(35-40장).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해 말하지만(12:1-12), 어린 양의 피 아래 피했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돌아서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했는지도 서술한다(32:1-6). 이 책은 먼저 구원하시고(1-12장) 그 후에는 동행하시며(13-17장) 최종적으로는 그분의 백성 가운데 내주하시는(29:42-46)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책이다. 그 중심에 성경의 근본 진리인 은혜와 율법이 있다(19-24장).
--- 「서론」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깨달음을 위해서 말씀에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 55:8)고 기록하신 것 외에 다른 식으로는 그분의 뜻을 설명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이야기는 우리의 질문에 꼭 들어맞는 답을 주지는 않지만, 역사를 통해 하나님 백성의 몫이 되어 온 어둠의 때에 대해 우리가 조금씩 이해할 수 있는 틀과 맥락을 제공한다. 그분의 백성이 이집트에 오기까지 하나님이 그들을 다루신 일을 기록한 창세기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 기록이 이후의 사건들에 빛을 비추어 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 준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계획을 그분의 방식과 척도대로, 그분의 시간 계획과 지혜에 따라 행하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비록 어두운 때였다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으며 만사는 계획되어 있었고 이후로도 다 잘되리라고 확신하게 된다.
--- 「1장 어둠의 때」 중에서
시간이 아무 위안을 주지 못하고 정치 변화가 개선을 가져오지 못하는 곳에서 기도는 변화를 일으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적 관점에서 고려할 때 모세의 경솔한 행동이 구원의 때를 후퇴시켰다면, 기도할 때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똑같이 말할 수 있다(참고. 단 9:23).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기도는 그들에게 임하는 구원의 시작이다. 기도가 하나님을 그 상황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 「2장 전환점」 중에서
참된 기독교적 섬김의 출발점에 대한 출애굽기의 관점은 매우 분명하다. 그 섬김은 여호와의 임재에서 시작된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낸다]”(3:10)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를 보내기 전에 먼저 그분께로 이끄시고 그분의 임재 앞에 서서 그의 하나님과 대화하게 하셨다. 섬김에 대한 성경적 준비는 언제나 우리가 여호와의 임재 속에 머무는 데 있다.
--- 「4장 깜짝 예고편」 중에서
큰 결정을 내린 후에도, 모세는 여전히 주저했다. 회심과 헌신이 반드시 기질을 바꿔 놓지는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기질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내향적이거나 우울한 사람은 회심해도 (바뀌지는 않고) 여전히 내향적이거나 우울하다. 따라서 18-19절의 행간에서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라는 모세의 당황스런 생각을 읽어 냈다면 정확하게 본 것이다. 여호와는 자비롭게 그를 위로하고 안심시키셨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리켜 보이셨다.
--- 「7장 간주곡: 경기장으로」 중에서
문제가 닥쳐올 때,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목적의식을 상실하는 일이다. 우리는 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할 수 없지만, 출애굽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가장 강력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일을 절대 멈추지 않으신다. 우주 전체를 향해서든, 교회를 향해서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개개인을 향해서든 마찬가지다. 이는 이집트를 나온 순례자들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의 결정 없이는 그리고 그분의 뜻에 부합하고 그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 「14장 하나님의 기이한 길」 중에서
백성에게 율법을 부과하신 분은 바로 구원을 베푸신 그 하나님이셨다. 구원하는 은혜가 요구하는 율법보다 먼저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속을 받으려고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받았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이 구원하신 사람들 앞에 마련해 두신 삶의 방식이며, 그들은 자신들을 구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응답으로 그 삶의 방식에 참여한다. 은혜와 율법은 함께 간다. 은혜가 율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구원하는 사랑은 감사와 순종으로 표현되는 사랑으로 이어지며 그런 사랑을 불러일으킨다.…십계명은 ‘자유의 법’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 진술이다. 십계명은 주로 금지령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의도와 어조가 부정적이라는 경솔한 비난을 받았다. 이는 부정 명령이 긍정 명령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큰 자유를 준다는 점을 잊은 것이다. 긍정 명령은 주어진 한 가지 행동 방식만을 따르도록 우리 삶을 제한하지만, 부정 명령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행동 방식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 「17장 열 마디 말씀」 중에서
제사장들이 성별되고 그에 응답한 후, 이들의 삶은 대부분 매일 제사를 되풀이해서 드리는 단조로운 날들로 이루어졌다(38-42절; 참고. 히 10:11). 1년 중에는 예를 들면 유월절과 속죄일처럼 눈에 띄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아론 자손의 제사장은 마치 똑같은 처방전을 되풀이해서 쓰는 의사와 같았다. 어제와 오늘은 별 다를 바가 없었고, 제사장들에게 요구된 의식들에도 처음의 신선함이나 흥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그런 삶으로 부르셨으며, 그 삶은 그들이 제사장으로 받은 특권을 특징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삶의 원리는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어야 했다.
--- 「20장 지성소에 이르는 길」 중에서
깨진 율법은 되풀이해서 주어졌다. 그 율법을 축소하거나 조정하거나 제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을 순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그분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그들에게 대책을 마련해 주셨다. 율법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성막과 제사장과 제사 제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죄를 위한 단번의 제사, 곧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빛을 따라 걷는 이들을 정결하게 하는 영속적 효력을 지닌 제사도 그대로 남아 있다(출 12:13; 히 10:12; 요일 1:7).
--- 「22장 두려운 후퇴의 한 걸음, 거대한 전진의 한 걸음」 중에서
성경에서 반복되는 내용은 성경의 우선순위를 강조한다. 중요한 내용은 두 번 이야기한다! 여기서 그 내용이란 바로 성막에 압축된 놀라운 사실 곧 여호와, 거룩하신 분, 구속자, 세상의 통치자, 은혜와 능력의 주권적인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실제로 오셔서 거하려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분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시는 일이기도 했다. 그들이 장막에 거하는 동안에 그분은 그들의 장막 가운데 자신의 장막을 치셨고, 그들이 이동하며 나아가는 동안에는 그분도 이동할 수 있는 집에 사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룻밤을 멈추든 장기간을 멈추든, 아니면 행진을 계속하든 여호와가 친히 그들 삶의 중심에 계셨다.
--- 「23장 영광의 구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