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책에서 한 가지 신학 주제가 이 책의 신학적 범주와 깊이를 전부 포괄할 수는 없지만, “언약”(covenant)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당연하다. 언약은 성경에서 가장 풍성한 신학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책이나 다른 예언서와 비교해 보더라도, 예레미야서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언약을 강조하는 책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할러데이의 주장에 동의한다. “예레미야의 선포 핵심에는 야웨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이 있다.” 또 “언약 관계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야웨의 말씀의 변함없는 기초다.”
--- 「예레미야서 서론 」중에서
이 신탁은 두 가지 중요한 예언 주제로 마무리된다. 곧 거룩함의 확장과 열방의 하나님 인정이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상징은 “언약궤”였다(추가 주석을 보라). 하지만 언약궤의 부재는 미래에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거룩할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느헤미야서 마지막에서는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된 뒤 성 전체가 “거룩하다”고 기록한다(느 11:1). 스가랴 14장 역시 예루살렘 성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에 물드는 환상으로 끝난다. 그로 인해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임재하신 예루살렘을 찾아온다(렘 3:17). 열방이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이는 장면은 예언서 다른 곳에도 나온다(사 2:2-4; 56:6-7; 렘 12:15-16; 16:19; 미 4:1-3; 슥 2:11; 8:2-23; 14:16-17). 신약성경에서 이방인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온다는 사실은 분명 이러한 구약성경의 기대의 성취라고 여겨졌다.
--- 「10. 미래의 회복(렘 3:12-4:4) 중 3:12-18 주석」중에서?
하지만 백성들은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머리 위에 감도는 심판의 전조에 주의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주전 7세기 말과 6세기 초 바벨론의 위협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유다 점령이 느닷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다. 백성들에게는 수많은 경고와 염려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신탁에 귀 기울이는 대신 “거짓말”에 주목했는데, 이는 거짓 예언자의 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특히 그들의 거짓말 덕분에 백성들은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찬미한다. 백성들은 피상적인 종교의 함정에서 위안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전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대표한다고 올바로 알았다. 그 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지상 거처에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엉뚱하게 추론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의 존재 자체에서 위안을 얻었다. 사건이 전개되면서, 우리는 이런 가정이 하나님과 성전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 근거해 있음을 깨닫는다. 열왕기상 8장 솔로몬의 성전 봉헌 설교가 명확히 밝히는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정통 신앙은 하나님이 이 구조물 안에 사신다고 믿지 않았다.
--- 「25.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렘 7:1-15) 중 7:3b-8 주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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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이 중요한 율법을 경시했더라도, 하나님은 다시 안식일 준수를 시작하라고 요청하신다. 모세 시대의 율법 전체와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명령에는 축복과 저주가 수반된다(신 27-28장을 보라). … 우리가 아는 한, 유다 백성은 이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그들은 추방당했다. 애석하게도 느헤미야 13:15-21에서 느헤미야가 설명하듯이,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뒤에도 안식일 준수는 계속 심각한 문제였다.
--- 「63. 안식일을 지키라(렘 17:19-27) 중 17:24-27 주석」중에서?
예레미야는 뜻밖의 방법으로 대답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냐가 하나님의 다른 메시지를 전했다고 생각하여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하나냐의 예언을 우호적으로 수용하되 의심을 품는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말이 틀려서 백성들이 그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기 원한다. 그는 자기 백성의 멸망을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 하나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바라고 그럴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 그는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한다. 대안적 해석에서는 예레미야의 진술을 역설로 이해한다(Lundbom, Jeremiah 22-36, p. 333). 본문에 근거하여 어감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 「74. 예레미야 대 거짓 예언자 하나냐(렘 27-28장) 」중에서?
이런 처참한 사건 기술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서는 (열왕기처럼)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설명으로 끝마친다. 기록된 마지막 사건은 파괴도 추방도 아니고, “여호야긴” 왕의 석방이다. 이 일은 그의 추방 후 “삼십칠 년…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주전 561년 4월 2일)에 일어났다. 이때는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아카드어로 “마르둑의 사람”을 뜻하는 아멜마르둑) 통치 첫해였고, 당연히 온정 어린 제스처였을 것이다.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의 추방에서 포로가 되었다. … 이 마지막 장은 두 가지 중요한 목적에 기여한다. 먼저, 유다의 죄 때문에 심판이 유다에 임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성취되었다고 분명히 밝힌다. 둘째, 심판 이후의 소망에 관한 예레미야의 메시지(30-33장)가 실현될 것을 예고한다.
--- 「97. 예루살렘 함락(렘 52장) 중 52:31-31 주석」중에서??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성의 파괴 상황에서 드리는 공동체 탄식시로 가장 잘 설명된다. 이 책은 그러한 파괴 생존자들의 고통과 고난, 실망, 분노를 표현한다. 지배적인 어조는 아니지만, 이 책은 또한 생존자들의 죄책과 소망도 표현한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인간 대리인[이름은 거명되지 않지만 원래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바벨론과 더불어, 이름이 거명되는(4:21-22) 에돔]을 비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난하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소망한다. 사실 불평과 고백, 회유, 인내, 부르짖음, 절규를 종합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부추겨 그분이 자신들을 위해 행동하시기를 바란다.
--- 「예레미야애가 서론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시간이 흐르면서 해어지거나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일 아침 “새롭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전과 다름없이 새롭고 생생하다. 덧붙여 23절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세 번째 특징, 그분의 “성실하심”(‘에무나’)을 소개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분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끈기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흔히 시편에서 성실하심을 보여 주는 분으로 찬양받는다(33:4; 92:2[3]; 143:1).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성실하심 때문에, 시인은 공동체를 대신하여 기꺼이 “그분을 기다리겠다”(wait for him, 개역개정판은 “그를 바라리라”)고 표현한다. 현재 상황은 나쁘지만, 하나님이 다시 그들에게 선을 행하실 것이다. “기업” 은유는 가나안 땅 분배에서 유래한다. 여호수아 19:9은 각 지파에게 할당된 땅을 그들의 기업이라고 부르고, 이 단어를 “유업”(‘나할라’)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킨다. 레위인은 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특별한 몫으로 소유했다(신 10:9). 이제 고난의 남자는 공동체를 대신하여 동일한 형태의 관계를 주장한다.
--- 「3. 고난의 남자(애 3:1-66) 중 3:22-24 주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