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10:1-6).
이 구절에서는 참 목자와 도둑이 뚜렷이 구분된다. 3절에 언급된 문지기가 더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래 두 가지 다른 비유가 여기서 통합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본문을 있는 그대로 보아도 그 목적은 뚜렷하다. 양떼를 다스리고자 하는 거짓 목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유일한 지도자의 길, 곧 예수님의 길(또한 예수님이 곧 길이다)을 좇지 않는 자들이다(7절; 참고 14:6). 세계 역사는 남을 다스리고 싶어서 통치자가 된 인물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양떼를 돌보고 먹이는 목자가 아니라 양떼를 파괴한 도둑이었다. 자칭 메시아, 구세주, '은인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길, 우리가 곧 배우게 될,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는 길을 좇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길을 통해서 위로 올라간다." 따라서 '리더십'이란 단어가 거의 학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리더십을 행사하려는 자들이 보편적으로 타락한 인물로 여겨지는 현상에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꼭 필요하고 합당한 리더십이 있다.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고 싶은 자는 유일한 참 문이신 예수, 그분이 열어 주시는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는 자는 인정과 신뢰와 추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분께 속한 자들은 그분을 아는데, 이는 그분이 낯선 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7-10).
공관복음에서처럼(예를 들면, 막 4:10) 여기서도 사람들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해서 엄중한 단언('진실로 진실로')으로 그것을 설명하신다. 문은 보편적으로 효과적인 상징이다. 그것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길이며, 따라서 저 세계의 실재가 이 세계로 전달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계 4:1). 그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고 사람들이 쉽게 놓치는 길이다(마 7:13-14). 그것은 영혼의 내적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길이다(계 3:20). 이 이미지가 가리키는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다. 그분은 인자로서 하늘과 땅의 교통이 오가는 사다리다(1:51)
모세는 여정의 끝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기도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6-17). 그렇게 해서 임명된 사람이 여호수아이며, 그 기도는 더 위대한 여호수아에서 최종적으로 응답되었다. 모든 사람이 안전과 자유를 갈망하고 있으며, 종종 전자는 후자를 희생시켜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방자는 금방 독재자가 되어 자유를 희생시키는 대가로만 안전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에 구현된 자유와 안전과는 다른 조건으로 그것들을 제공하는 자칭 구원자들로 가득 차있다. 그분의 음성을 아는 자들은 그들의 제의에 유혹 당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은 그분의 길을 따라감으로써 그분이 안전과 자유 둘 다를 주신다는 것과, 그들의 필요가 풍성하게-"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눅 6:38)-채워진다는 사실을 배운다. 나중에 우리가 배우게 되지만(14:1-6), 길이나 문(즉 예수님 자신)은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인 동시에, 우리가 기존의 안전 장치에서 떠나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는 새로운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우리에게는 들어가고 나갈 자유가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가 공급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쾴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10:11-13).
그러나 이 풍성함은 굉장한 대가를 지불하고 산 선물이다. 문의 비유는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으므로, 지금까지 줄곧 배경에 깔려 있던 또 다른 비유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며, 양떼를 위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 하나님이 종종 약속하셨던 일(사 40:11; 렘 31:10; 겔 34:11-16)을 행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그 약속의 성취에는 선지자들의 시각을 넘어서는 대가가 포함되어 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로 풍성한 생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참 리더십과 거짓 리더십을 구별할 수 있는 틀림없는 기준이 있다. 우리는 자아를 지나치게 확장시켜 놓은 유의 리더십에 익숙해져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공개적으로 인정되든 그렇지 안든-지도자의 영광이다. 나머지는 이 목적을 이루는 도구일 뿐이다. 그는 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할 뿐이다. 그는 자기가 얻어낼 것을 위해 리더 역할을 하는 삯꾼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참 지도자의 표지는 십자가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소명이 의심받았을 때 내놓은 유일한 증거다. 그는 자기 삶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고 간다고 말한다(고전 4장; 고후 11장).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그러한 참된 리더십이 요즈음 유행하는 바 '엘리트주의'에 대한 경멸로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적인 언어로 보면, 엘리트는 선택받은 자이고, 그들은 지극히 뛰어난 하나님의 택한 자이신 그분을 좇아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선택받았다. 만일 그들이 양들의 안전보다 자기의 안전을 우선시한다면 참 목자가 아니라 삯꾼에 불과하다. 그들이 (여기처럼) 법적, 교회적 기성 체제의 지도자든 기성 체제 바깥에서 즉석 구원을 조달하는 자로서 짧은 영광을 누리는 가짜 메시아든 간에, 참 목자가 오시면 그들의 진면목이 노출될 것이다.
--- 11장 선한 목자(10:1-4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