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폴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은 1848년 6월 7일에 출생하여 1903년 5월 8일에 사망한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이다. 그는 인상주의와는 명백히 다른 색상과 스타일을 실험하였고,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후 유명해졌고, 그의 많은 작품들은 러시아 수집가인 세르게이 쉬슈킨이 보유하고 있다. 그는 화가, 조각가, 판화 제작가, 도예가와 작가로 상징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2. 생애
1) 유년 시절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저널리스트인 클로비 고갱과 페루 출신인 페미니즘의 선구자이자 사회주의 리더였던 플로라 트리스탄의 딸인 알리나 마리아 샤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1850년 당시, 정치적 환경으로 인하여 고갱의 가족은 파리를 떠나 페루로 갔다. 여행 도중 아버지는 18개월 된 고갱과 어머니 그리고 고갱의 누이동생을 남겨 두고 사망하였다. 그들은 4년 동안 페루 리마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며, 이때 고갱이 경험한 페루의 이미지는 훗날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7세 때, 고갱과 그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친할아버지가 사는 올레앙으로 이사하였고, 그 곳에서 채소와 청과물을 판매하였다. 고갱의 뜻은 “호두나무 재배자”이다.
2) 군 복무와 파리 증권 거래소
14세 때 고갱은 리세 잔느 다르크에서 올레앙으로 돌아오기 전, 파리의 해군 예비학교인 로리올 인스티튀트에 입학하였고 3년 후 해군에 입대하여 2년간 근무하였다. 1867년 7월 7일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하였을 때, 그의 누이인 마리예가 쓴 편지가 인도에 있던 고갱에게 도착할 때까지 고갱은 몇 달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있었다.
1871년, 고갱은 파리로 돌아와 주식 거래 중개인 직업을 얻었는데, 이 직업은 어머니의 친구였던 구스타프 아로자가 ‘파리 증권거래소’의 일을 그에게 주선한 것이다. 그는 이 일로 파리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고 이후 11년 간 계속 그 일을 하였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고갱의 수입은 크게 줄어들었고 결국 그는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3) 결혼
1873년, 그는 덴마크 출신의 메트 소피 가트와 결혼하였다. 이후 10년 간, 그들은 에밀, 알린, 클로비, 장 르네와 폴 로롱 등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1884년, 고갱은 그의 가족과 함께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여, 여기에서 방수포 판매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사업에 실패하였다.
고갱이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결혼 11년 만에 그의 가정은 파탄이 났다. 그의 아내와 처가 식구들은 고갱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였고 그는 1885년에 파리로 돌아갔다. 그들과 고갱의 마지막 만남은 1891년이었고, 1894년에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4) 전업화가로의 길
1873년, 그가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던 시절 고갱은 틈틈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살았던 브뤼에르 가 15번지 근처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주 드나들던 카페들이 있었다. 고갱은 갤러리를 방문하면서 신진 화가들의 작품들도 구매하였다. 그는 카미유 피사로와 친구가 되어 매주 일요일에 그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1877년에 고갱은 생활비가 적게 드는 보지라르로 이사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작업실이 딸린 집을 처음으로 얻게 되었다. 그의 집 근처에 살았던 친한 친구였던 에밀 슈페네커도 이전에 주식 중개인이었고 그도 화가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고갱은 1881년과 1882년에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들을 출품하였다.
출품작 중 보지라르의 시판용 채소밭 (The Market Gardens of Vaugirard, 1879)과 같은 일부 작품은 현재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당시 그의 그림들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1882년, 주식시장이 붕괴되었고 미술시장이 축소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요 화상인 폴 뒤랑 뤼엘은 특히 큰 영향을 받았고 일정 기간 고갱을 비롯한 화가들의 그림 구매를 중단하였다. 고갱의 수입은 급격히 감소하였고 이후 2년 동안 그는 전업화가를 준비하였다.
이후 두 차례의 여름을 지나는 동안, 고갱은 피사로 그리고 가끔씩 폴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1883년 10월, 고갱은 전업화가를 결심한 후 다음 해 1월에 가족과 루앙으로 이사하였다. 그러나, 그 해 말, 메트는 코펜하겐으로 돌아갔고, 고갱도 그녀가 떠난 직후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그 곳에서의 생활은 어려웠고 그들의 결혼 생활도 악화되었다. 친정의 지원으로 생활하던 메트의 성화로, 고갱은 다음 해 파리로 돌아갔다.
5) 파리와 퐁타방
1885년 6월, 고갱은 여섯 살난 아들인 클로비와 파리로 돌아왔고 다른 아이들은 코펜하겐의 메트와 함께 남았다. 고갱은 파리에서 미술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힘들고 가난한 첫 겨울을 보냈다. 클로비는 결국 병이 나서 기숙학교로 갔고, 고갱의 누이인 마리예가 학비를 댔다. 고갱은 1886년 5월에 열린 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 19점의 그림과 한 점의 목조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러한 그림 대부분은 루앙 또는 코펜하겐에서 그린 초기 작품들이었고 순환 모티브의 하나가 된 목욕하는 여인들 (Women Bathing)을 소개하였다. 이 전시회에서는 파리에서 아방가르드 운동의 리더로 불리던 조르주 쇠라가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고갱은 쇠라의 신인상주의 ‘점묘법’을 거부하였고, 이러한 관점 차이로 피사로와 결별하였다.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에 있는 예술가들의 공동시설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고갱은 뛰어난 복싱선수이자 펜싱 선수였고, 그의 그림만큼이나 기이한 외모로도 유명하였다. 이때 만난 새로운 친구들 가운데, 샤를 라발이 있었는데, 그는 다음해 고갱과 함께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에 동행하였다. 그가 퐁타방을 방문했을 때 그린 목욕하는 브르타뉴 소년들 (Young Breton Boys Bathing)은 드가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이러한 스케치들은 후일 파리 작업실에서 다시 물감 작업을 하였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브르타뉴의 네 여인 (Four Breton Women)이었다. 인상주의에 실망한 고갱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미술에 매료되었고, 당시 유럽에서 유행이었던 자포니즘에도 매료되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