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1장은 우리 모두에게 소망을 준다. 먼저 바울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강조한다. 일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든 일의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실하심을 구체화시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면(롬 11:30) 우리도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라는 요구를 받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형편없는 업무 처리를 눈감아 주라거나, 괴롭힘이나 차별을 보고서도 침묵을 지키라는 의미는 아니다. 긍휼은 압제하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실패가 오로지 그만의 실패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같이 일하던 누군가가 실수했을 때 경쟁력이 없다며 그를 비난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런 잘못에서 회복되도록, 또 어떻게 하면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지를 배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누군가 우리의 신뢰를 깨뜨렸을 때 우리는 그 사람편이 돼 주거나 함께 책임을 져 주어야 하며, 만약 그가 회개해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간다면,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 pp.69-70
당신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얼마나 많이 투자하는가? 그 답은 당신이 직장 동료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지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중보기도를 할 만큼 동료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동료의 필요와 근심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가? 동료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삶을 알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는가? 다른 이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의 삶을 충분히 공유하는가? 직장 동료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도 될지 묻거나, 또는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그들에게 요청해 본 적이 있는가? 동료들이 내 신앙을 공유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순수한 제안이나 나를 위해 기도 또는 기원해 달라는 요청을 대부분의 경우 환영한다.
--- p. 136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곧 재림하셔서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며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 근로자들은 맡은 일을 수준 이하로 수행하고는 직장에 다니는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동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리고 다른 이의 자선에 불필요하게 의존하는 문제도 지역적인 맥락(올해에만 세 번째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목사님에게 돈을 요구하는 경우)과 세계적인 맥락(해외 원조가 과연 진정한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발생한다.
--- p. 251
하나님의 우주적인 건축과 관련된 히브리서에 딱 맞는 예로 어떤 건축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에 분명한 비전이 있다. 그는 그 나라가 공의와 조화로운 관계와 영속되는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는 현재에 이 비전을 실현시키고자 애쓴다. 그는 집 짓는 일에서 원자재를 구하는 청지기직을 수행하면서, 아름답지만 사치하지 않는 집을 만들어 낸다. 그는 장차 올 하나님 도성의 특징이 될 관심과 존중으로 고객과 하청업체 직원들, 인부들을 대한다. 그는 지상의 집에 기대하는 고객들의 소망에 귀를 기울이고, 제한된 돈과 자재를 이용해 그런 소망들을 실현시켜 주려고 애씀으로써 자기 고객들에게 하늘에 속한 사랑을 보여 준다.
고풍스러운 난방 장치를 욕실에 설치하려고 했더니 딱 5센티미터가 길어 안 맞을 때, 또는 목수가 엄청나게 비싼 들보를 잘랐는데 딱 5센티미터가 모자랄 때, 이러한 문제들을 참아 낸다. 그는 지진이나 태풍이 자신의 모든 수고를 순식간에 파괴시킬 수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일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붓는다. 기쁨과 좌절이 교차하지만, 그는 자신이 짓고 있는 집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관계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보임으로써, 하나님 도성이 추구하는 가치대로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비록 무너지기 쉽고 불완전하다 해도) 자신이 짓는 모든 건물이, ‘건축주와 건설자가 하나님이신’(히 11:10) 앞으로 올 위대한 도성에 대한 매일매일의 증거라는 것을 신뢰한다.
--- p. 251
일터에서의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시험”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야고보는 특별히 앞서 말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들이 “믿음의 시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우리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시련으로 이어지는 도전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다.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일터에서 편견, 구직 제한, 해고, 신체적 상해, 죽음에까지 노출될 수 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더라도,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시련은 윤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정직하지 못함, 불공정 거래,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내 앞길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 등을 통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직장생활에서의 실패가 또 다른 시련이 될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충격이 커 자칫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예컨대 정리해고나 일반적인 해고를 당하고 나면 너무도 황당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모든 것들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터로 부르셔서 큰 성공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혹은 ‘우리가 그분께 충실했으니 성공시켜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국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필요를 계속 채워 주실지 의심할 수도 있다. 일과 관련된 이 모든 도전들이 믿음의 시련이 될 수 있다.
--- pp. 330-331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혹시 우리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지식을 비축하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안전감을 주는 고액의 퇴직금 혹은 고용계약서를 요구하는가? 날마다 해고의 두려움을 안고 출근하는가? 가족과 공동체를 소홀히 여긴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며 일하는가? 다른 여지가 없다는 불안 탓에 굴욕, 분노, 업무 미숙과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도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엄격한 원칙은 없으며, 이런 행동 중 (강박 상태를 제외하고) 일부 혹은 전부는 특정한 상황에서 현명하고 적절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지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신뢰하는지를 읽어 내는 가장 탁월한 지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돕는가? 혹 그가 나보다 앞서갈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리하는가? 내 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동료들, 고객들, 납품업자들, 그리고 힘없고 어려운 자들을 지원하러 나서는가? 선택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나 자신의 유익보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편인가?
유다서가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매일 일터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할 무거운 책임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영적 민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일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육신적 결과의 문제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을 갖기 위함이다.
--- pp. 379-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