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그들은 리처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그들은 그를 ‘학교’로 돌려보냈다. 훈장은 미 육군 수훈장. 리처로서는 두 번째받는 것이다. 흰색 에나멜, 주황과 빨강의 중간색 리본. 제법 멋있는 물건이다. 미 육군 규정 600-8-22 조항은 수여 자격을 명시하고 있다. 중대한 책임을 맡은 군인으로서 미국을 위해 발군의 임무 수행 능력을 발휘한 자. 리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만한 자격은 있었다. 하지만 수훈장이 그의 차지가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첫 번째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거래. 계약의 징표. ‘이 양철 쪼가리를 받아. 그리고 그 대가로 우리가 네게 시키는 일을 군소리 말고 처리해.’
--- p.5
“접선은 이루어졌습니까?”
“둘째 날 늦은 오후에. 연락책이 50분 동안 나가 있다가 돌아왔어요.”
“그다음엔 어떻게 됐습니까?”
“그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떠났어요.”
“더 이상 대화는 없었습니까?”
“한 차례 더 대화가 오갔어요. 우리에겐 아주 고마운 일이었죠. 연락책이 무심결에 정보를 흘렸으니까. 본부로 전달할 메시지를 자기 친구에게 말해준 거예요. 비록 출중한 투사지만 그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거죠. 그 메시지 내용에 압도당한 상태였으니까요. 엄청난 규모의 프로젝트. 이란 친구의 얘기로는 아주 흥분한 상태였대요. 결국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거죠. 20대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니 당연했겠죠.”
“어떤 정보였습니까?”
“이란 친구의 느낌이 맞았어요. 1차 가격 제시. 숫자가 중심이 된 짤막한 메시지.”
“어떤 메시집니까?”
“‘그 미국인이 1억 달러를 요구합니다.’”
--- p.33
그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생전 처음 마주한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벌거벗은 매춘부가 그의 팔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그녀의 아파트, 그녀의 침대였다. 깨끗하고 단정했다. 향기로웠다. 열심히 가꾼 흔적이 곳곳에 역력했다. 집세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건 집주인의 화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곧 대단한 부자가 될 몸이 아니시던가. 매춘부와의 잠자리는 일종의 자축 행사였다. 게다가 그는 비싼 매춘부가 좋았다. 그만큼 섹스의 수위도 높기 때문이다. 그의 취향은 아주 단순했다. 여자의 반응,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옆에 누운 여자는 만점에 가까웠다. 정말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몸부림쳤다. 그것도 여러 번. 폭풍이 지나간 뒤 두 사람은 서로 바짝 끌어안은 채 얘기를 나눴다. 남녀 간의 잠자리 대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말았다.
--- p.49
마침내 연락책이 예의 작고 무더운 방으로 호출됐다. 그 공간에도 높은 창이 나 있었다. 춤을 추는 먼지 알갱이들, 날아다니는 파리들. 햇살 아래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작고 뚱뚱했다. 다른 한 명은 크고 말랐다. 어제와 똑같은 두 남자, 똑같은 방석들, 똑같은 흰 로브, 똑같은 흰 터번.
키 큰 남자가 말했다. “오늘 우리의 대답을 가지고 떠나거라.”
연락책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키 큰 남자가 말했다. “세상의 모든 거래에는 흥정이 오가는 법이다. 하지만 우린 지금 낙타를 사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대답은 간단하다.”
연락책이 다시 머리를 숙였다. 이어서 고개를 살짝 꼬았다. 온몸이 귀가 되어 기다리고 있다는 듯.
키 큰 남자가 말했다. “미국인에게 그가 제시한 가격을 지불하겠다고 전하거라.”
--- p.83
잠시 후 그녀가 지갑을 찾아든 뒤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두툼한 파란색 가죽 지갑. 똑딱이 단추로 여닫는 방식이었다. 그녀가 컵 옆에 놓아둔 운전면허증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똑딱이 단추를 열고 면허증을 제자리에 넣었다. 아니, 넣으려고 했다. 그녀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녀가 말했다. “내 면허증은 지갑 안에 그대로 있어요.”
그녀가 손가락들을 집게처럼 놀려서 반투명 수납창 안에 박혀 있는 면허증을 끄집어냈다.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운전면허증. 모든 점에서 똑같았다. 컬럼비아 주, 면허번호, 주소, 생년월일, 서명, 심지어 사진까지도 똑같았다.
두 개의 운전면허증.
일란성 쌍둥이.
--- p.202
그가 말했다. “오로스코를 내게 오라고 해줘. 지금 당장. 그와 용무가 끝나고 나서 5분 뒤에 싱클레어와 만날 약속을 잡아줘.”
“그러지 않아도 그녀는 당신을 찾고 있어요. 당신에게 전할 소식이 있대요.”
“무슨 소식?”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요. 다만 밴더빌트가 뭔가 해낸 모양이에요. 그녀가 이만저만 들뜬 게 아니에요.”
“오로스코에게 내 위치를 전해. 호텔에서부터 세 블록 떨어진 지점에 남성복 상가가 있어. 여긴 그 한가운데에 있는 이발소야. 최대한 서두르라고 해.”
“뭔가 있는 거죠, 대장?”
“그 미국인이 누군지 알아냈어.”
--- 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