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과 대다수 귀족들은 막부의 세상을 원망하며 천황이 군림하던 지난날을 그리워했을지는 몰라도, 그러한 규제에 울분을 터뜨리는 일은 없었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지극히 좁았으나 그 한계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보잘것없는 소소한 관심사만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궁중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궁중 생활에 간섭하는 막부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에도에서 파견 나온 관리의 존재에 분개하는 사람들까지도 막부에서 주는 봉록 없이는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궁중의 의식이 얼마나 토지 점에 좌우되었는지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생각은 헤이안(平安)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가령 이야기책이나 수필 같은 데서 곧잘 마주치는 ‘가타타가에(方違え,방위틀기)’처럼 나들이를 하는 경우 불길한 방위를 피해가는 토지의 방위는 사람들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똑같은 속신이 오늘날에 와서도 스러지지 않고 있다.
구로다의 진언은 무작정 개국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함대가 우라가 앞바다에 모습을 나타낸 지 2개월이 안 되는 기간에, 그것도 겨우 석탄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대통령의 국서를 계기로, 힘 있는 다이묘 가운데 한 명이 2백 년 이상이나 이어져온 제도의 해체를 제안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구로다는 막부 자체의 해체를 제안한 것이 아니다. 또 이전부터 속삭거려 온 신생 일본의 천황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시사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도쿠가와 정권의 기반이었던 쇄국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돈켈?쿠르티우스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그리고 그가 경고한 일본에 대한 열강들의 위협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논증의 기본이 되는 제안, 즉 보편적인 교역 윤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은 반드시 잿더미가 되고 말 것이라는 이치는 유교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인간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돈켈?쿠르티우스가 말한 대로, 교역은 당사국 쌍방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해서 어떻게 그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분명 막부의 관리들은 거만했다. 질질 끌자는 전술은 울화가 터지게 만들고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 외국은 자신들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른 떠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공연히 모욕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고메이 천황이 내린 칙서는 모조리 막부에 의해 휴지가 되고 말았다. 고메이 천황으로서는 이 탄압이 굴욕적이었다. 아버지 닌코 천황 때부터 자신을 충실히 섬겨온 노신들이었다. 설령 조약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쳐도 그것만으로 삭발하고 출가하는 라쿠쇼쿠를 당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막부의 안위에 관계되는 문제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는 천황의 원한을 사는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본보기로 이 네 명의 중신을 징벌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조정의 위엄의 본질과 실태의 모순이 이처럼 확연하게 드러난 일도 없다.
그 전해, 조선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아홉 명과 미국 상선의 수병 몇 명?그중에는 영국인 승무원도 있었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함대가 출격하는 등 조선과 열강들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일본 내에서는 조선과 연맹을 맺어 구미에 대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막부는 조선에 사절을 보내 구미 열강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의 불리한 점을 설명하면서 이 분쟁의 중재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또한 막부는 1867년 4월에 로주 세 명이 연서한 서한을 미국 공사에게 보내 만일 조선이 태도를 바꾸어 미국과의 강화에 동의한다면 미국은 조속히 이에 응하라고 종용했다. 2세기 반에 걸쳐 서양과의 접촉을 끊어 온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적절한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 조언하는 입장에 서려 한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뼈아픈 패배를 맛본 이날 저녁, 요시노부는 막부의 중신과 각 부대 대장을 오사카 성에 불러들여 대책을 강구했다. 모두들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요시노부가 직접 나서기를 바랐다. 요시노부는 쾌히 이를 승낙했고 대책 회의는 돌연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날 밤, 요시노부는 몰래 오사카 성에서 도망쳤다. 덴포 산 앞바다에서 막부 군함 가이요(開陽) 호를 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가이요 호는 아직 도착해 있지 않았다. 요시노부는 잠시 미국 군함 일로쿼이 호를 타고, 가이요 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인 7일 아침, 요시노부는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 몇 명만을 데리고 가이요 호에 승선해 8일, 에도를 향해 출범했다. 성에 남아 있던 막부군이 요시노부가 사라진 사실을 안 것은 7일 아침이었다. 그들은 성을 버리고 탈주했다.
1875년, 이미 도쿄는 완전한 일본의 수도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도쿄는 황궁과 모든 정부 기관의 소재지일 뿐 아니라 외국 공관의 소재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어쩌면 교토 시민의 반응을 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메이지 천황은 사후 교토에 안장되었고, 다이쇼(大正) 천황의 즉위식도 1915년 교토에서 거행되었다. 이 일은 교토가 어떤 의미로는 아직도 수도라는 신념이 뿌리 깊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렇지 않다는 반대 성명이 나오지 않는 한 지금 다시 교토가 일본의 수도라는 주장이 나온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젊은 천황은 치가 떨리도록 원통했을 것이다. 일본이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문명국이라는 것을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가며 서양 제국에게 납득시키고 있는 터에, 겨우 2년 사이에 세 명의 정부 요인이 암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30년 동안 수많은 암살 사건과 암살 미수 사건이 빈발해서 서양 제국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 서양 제국이 치외법권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가 곤란해졌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일본은 근대화를 향해 빠른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철도와 전신은 전국 구석구석까지 뻗쳤고 새로운 서양 문물은 매일 도입되었다. 그것에는 의료품, 식료품, 기계 같은 것은 물론이고 사진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사람들이 막부 말의 소란스러운 시대에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정열에 가끔씩 몸을 떠맡기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
개혁파들로서는 조금이나마 자치권을 지닌 번을 현으로 바꿔 중앙 정부 지배 아래 두는 일을 유일한 해결책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무사 계급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것이고 대다수의 평민은 번주를 최고의 권위자로 알고 있었다. 만일 번주가 천황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평민 역시 천황의 뜻을 따르기 어려울 것이다. 번주의 영향력은 영지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서 영민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터였다. 이미 폐번치현 이후 120년이 경과된 오늘날까지도 가나자와(金澤)를 방문하는 사람은 으레 가가(加賀)의 마에다(前田) 가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수백 년 동안이나 번을 지배해 온 마에다 가의 문장(紋章)이 가나자와 거리 곳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궁중의 급격한 변화에 어리둥절해진 사람은 결코 하시모토 한 사람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 않고 5월 23일 오전 4시, 천황은 순행에 나섰다. 이때 천황이 처음으로 입은 연미복 스타일의 단추가 있는 제복은 후에 천황의 가장 전형적인 복장이 되었다. 천황의 양복 차림은 보수적인 백성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천황이 나가사키에 체재하는 동안 현민(縣民) 아무개는 건의서를 제출해 천황의 양복 착용 중지를 호소했다. 궁내경 도쿠다이지 사네쓰네는 그 처치를 사이고 다카모리와 의논했고, 사이고는 건의서를 낸 자를 불러 “그대는 아직 세계의 대세를 모르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바로 3, 4년 전 양이를 외치던 무사들이 있을 때라면 이런 항의가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일본 측의 불쾌감은 조선 측에서 받은 다음과 같은 인상에 의해 배가되어 있었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문명개화 정책의 채용을 거부했다. 조선은 지금 결정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 조선은 여전히 서양에 문호를 닫고 있었다. 일본인의 눈으로 볼 때, 조선은 바로 지난날 유럽인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이었다. 그런 일이 조선의 후진성에 대한 모멸감을 낳았다. 지난날 중국 문화의 전파자로서 조선에 대해 품고 있던 존경의 마음과는 현저하게 대조적인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고의 서한에서 각의에서의 발언과 같은 취지를 엿볼 수 있다. 사이고는 분명 조선에서의 자신의 희생이 전쟁을 위한 좋은 구실이 될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학자 가운데는 주전론자라는 사이고의 혐의를 불식하고자 사이고가 실은 평화주의자였고 조일 양국 관계가 원만히 해결되길 바랐다는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조선에 파견되는 사절은 궁중 의상을 입어야 하며 군대나 군함을 이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사이고의 주장이 그러한 의도를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타가키에게 쓴 편지가 사이고의 진의를 고의로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이고가 전쟁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조선에서의 사이고의 죽음은 전쟁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대의를 위해 죽는다는 만족감을 그에게 줄 수 있었다.
전년 11월의 징병 조서(詔書)와 함께 공포된 징병 고유문(?諭文) 속에 ‘혈세(血稅)’라는 글자가 있었다. 이는 ‘병역’을 완곡하게 가리킨 말로 ‘그 생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호조(北條:지금의 오카야마岡山 현) 현의 농민들은 그것을 글자 그대로 ‘징병은 백성의 생피를 착취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부근 마을에서 의사 같은 차림을 한 사람을 보았다는 유언비어가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이 조처에 대한 불만으로 말미암아 당장 여러 마을의 촌민 3천여 명이 무기를 들고 봉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첫 표적이 된 것은 엉뚱하게도 피차별 부락?에도 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일반 사람들과 상종할 수 없는 천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 보통 부락(部落)이라고 부른다?이었다. 부락은 습격되고 불태워졌다. 이전에는 순종적이던 ‘피차별민’이 신체제를 만나 오만해졌다는 것이 습격의 이유였다. 분노의 창끝은 소학교를 위한 세금 징수, 서양풍의 단발, 소의 도살에까지 겨누어졌다. 이러한 특정의 불만 표출에서도 알 수 있듯이?징병제에 대한 오해가 봉기의 직접 원인이었지만?이는 근본적으로는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정부의 수많은 변혁에 대한 불만의 폭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신풍련은 가장 극단적이었다. 신풍련은 서양의 영향을 저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복 착용이 되었건, 서양 달력의 사용이 되었건, 서양의 영향을 이 세상에서 흔적 없이 지워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가령 전기를 혐오한 나머지 전깃줄 밑을 지나야 할 때면 부채를 펼쳐 머리를 가리고 재빨리 지나, 해롭기 짝이 없는 외국의 영향에서 몸을 지키려고 하였다. 또 항상 소금을 가지고 다니면서 승려나 양복 차림의 일본인, 장례식 등과 마주칠 때마다 일종의 ‘벽사(?邪) 의식’을 했다. 그중에는 지폐 역시 서양 것을 흉내 낸 것이므로 몸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여겨 손으로 직접 만지지 않고 젓가락으로 받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들은 근대 병기 사용을 거부하여 다가올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보복을 당하게 된다. 라이플과 대포로 무장한 군대에 신풍련은 칼과 창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점진파인 이토는 천황의 장래 역할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외채 모집, 그리고 토지세 미납론(米納論)을 부정한 천황의 결단은 이미 수동적, 상징적 역할에 머무르는 일 없이 스스로 중대한 결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싶어하는 의사 표명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이토는 이 일이 천황의 정치 책임 문제 발생과 천황제의 시비를 가리려는 논의로까지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로서는 천황은 어디까지나 천황을 보필하는 내각의 상징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특히 이토는 정치적 책임이 없는 궁중파가 천황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할까 우려했다. 그것은 내각의 국가 운영 불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토는 극비리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협의한 끝에 자유당의 힘을 약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으로 이타가키와 고토 쇼지로를 당분간 외유시키기로 동의했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두 사람의 외유 비용 조달을 꾀했다. 최종적으로 육군성 공금 취급 업무를 3년 연장해주는 조건으로 미쓰이(三井) 은행에서 2만 달러를 대출했다.
1882년 8월 말, 이타가키는 갑자기 유럽행을 발표했다. 고토도 뒤를 이어 유럽행을 발표했다. 이타가키나 고토나 유럽 사정을 연구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바바 다쓰이에 의하면 두 사람은 외국어는커녕 로마자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이 유럽에서 무슨 중요한 정보를 얻을 가망은 전혀 없었다. 두 명을 위해 통역 한 사람이 배치되었는데, 주된 임무는 두 사람의 행동을 잘 살폈다가 이노우에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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