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서양파 정부 수뇌는 이런 호소에는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그들은 로쿠메이칸에서 향락에 빠져 오로지 서양의 매너에 정통함으로써 서구 선진국의 우호와 존경을 획득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소국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유럽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근대 국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유럽인과 같은 복장을 하고, 유럽인과 같은 식사를 하고, 자신들의 사회에서 구식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일부러 서양의 법 제도를 도입, 채용하고, 기독교를 도입하고, 영어를 국어로 삼으려 했다. 나아가 일본 인종 개량을 위해 유럽인 아내를 얻으려 하기까지 했다.
1889년, 제국 헌법은 아시아 제국의 어떤 헌법보다 진보해 있었다. 그리고 유럽 제국의 몇몇 헌법보다도 자유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이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서의 천황 및 천황에 부여된 주권의 강조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헌법의 수여는 일본에서의 대의(代議) 정체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날 공포된 상유(上諭)는 제국 의회가 1890년에 소집되면서, 의회 개회로 헌법이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다른 자료는 암살 동기로 다음 세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쓰다는 러시아에 사할린을 할양한 데 분개했다. 그리고 일본 침략에 대비해 러시아 황태자가 미리 정찰하러 일본에 온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또 니콜라이가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처음부터 도쿄로 가지 않고 나가사키와 가고시마에서 여흥을 즐기며 각지를 유람한 것에 화가 났다. 쓰다의 범행 동기로 단연 흥미를 끄는 설명이 있었는데 이는 어떤 소문과 관련이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실은 살아 있으며, 이미 러시아인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했다는 소문이었다. 서남 전쟁에 종군한 쓰다는 사이고의 귀환을 환영할 수 없었다. 쓰다는 그때 세운 공로를 박탈당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오쓰 사건은 정부 각료가 우려했던 것처럼 전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암살 미수 사건 탓으로 니콜라이가 13년 후 발발한 러일 전쟁의 이유가 될 만한 반일 감정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은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사건이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성과는 의심할 나위 없이 일본의 사법권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지마 고레카타가 보여준 용기의 결과였다. 고지마 자신은 정치가에게 반대했다고 해서 불리한 입장에 처해지지는 않았다. 1894년, 고지마는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오쓰 사건에 대한 고지마의 수기는, 관계자의 생존 중에는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31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고지마는 틀림없는 근대 일본의 영웅 중 한 사람이었다.
관이 조선에 도착하자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시체를 관에서 꺼내 머리와 양팔, 양다리를 절단해서 ‘모반대역부도죄인옥균(謀叛大逆不道罪人玉均)’이라고 쓴 깃대와 함께 말뚝에 매달았다. 몸통은 말뚝 옆에 방치되었다. 조선 정부의 복수는 이 참형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김옥균의 가족 역시 처형되었다. 홍종우는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일본인은 김옥균의 암살에 분노했다. 청나라가 사건에 간여했기 때문에 이 일은 청나라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중국 숭경(崇敬) 1천 년 전통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외무차관 하야시 다다스(林董)는 회고록에 ‘수개월 후의 청나라와의 전쟁 발발은 김옥균 암살과 이 사건에 대한 청나라의 관여 때문에 앞당겨지게 되었다’고 썼다.
만일 외국인 특파원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이런 언어도단의 사건은 결코 기록되는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뤼순 학살 사건은 아직까지도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짐승도 아닌 인간들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처참한 행위를 저지를 수가 있단 말인가. 전투 중에 팔다리가 절단된 전우들의 시체를 보면 저도 모르게 피가 거꾸로 솟구쳐 일상의 규율쯤이야 날려버리는지도 모른다. 인간으로 타고난 예절을 포함해서 개인의 신념은 용해되어 하나의 정념으로 화하고, 살육의 본능만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집단적 행동으로 치달아 미쳐 날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항복 문서를 받았을 때, 이토 사령장관은 제독에 대한 위로와 의례로 포도주, 샴페인, 곶감 등을 보냈다. 2월 12일 아침, 백기를 든 청나라 포함(砲艦) 전베이(鎭北)가 연합 함대 기함 마쓰시마에 접근했다. 군사는 북양 해군 제독 딩루창이 이토 사령장관에게 보낸 정식 투항서를 가지고 있었다. 딩 제독은 웨이하이웨이 해역에 있는 함선, 포대, 병기를 내놓는 대신에 청나라 부대와 외국인 고문의 안전 보장을 요구했다. 16일, 딩 제독은 청나라 해군을 잃은 책임을 진다는 뜻의 한시 한 편을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이노우에는 일본 정부의 개화 정책과 같은 형식으로 조선 정부를 개혁할 생각이었다. 이노우에의 후계자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의견에 의하면, 이노우에의 계획이 실패한 까닭은 조선 정부가 반드시 재정적 개혁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이노우에가 데리고 온 일본의 재무고문관은 정확하게 예산을 정해놓고 지출을 그 한도 안에서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조선 국왕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지금까지 국왕은 재원이야 있건 없건 마음 내키는 대로 돈을 사용하고 있었다. 국왕은 재정적 자력(資力)이 중요하다는 긴 설명에 겉으로는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이 평상시의 낭비로 되돌아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많은 외국인 거주자들은 더 이상 영사재판소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극도로 긴장했다. 그러나 외국인의 대량 체포도 없었고 일본 경찰의 수사도 없었으며, 외국인이 고문을 당했다는 보고도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들이 공연한 공포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국인들은 왜 치외법권이란 방패가 없으면 안 된다고 여겼는지 스스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되었어도 외국인은 우월감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또 일본인들은 나라를 운영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외국인에게 증명하느라 지금까지 해온 노력을 떠올리며 씁쓸해했다.
고종 황제와 이토 히로부미의 회견은 4시간이나 끌었다. 황제가 얼마나 굴욕감을 느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황제는 양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토가 언명한 것은, 만일 황제가 거부한다면 일본은 군사 개입을 해서 조정을 타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토라는 인물을 묘사할 때면, 대개의 경우 도회적으로 세련된 고도의 문명인으로서의 이토를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토는 지금 외면적인 부드러움의 이면에 비정한 가혹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토는 실제로는 일본인이 내린 지시를 마치 황제 스스로 내린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황제에게 한 조각 자존심마저 남겨 주기를 거절했다.
전쟁에 이겼다는 것, 그리고 해외로부터 들려온 칭찬의 목소리는 일본인에게 자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당시의 비평가들은 젊은 남녀 사이에서 유행하던 ‘번민적 염세 사상’ 탓에 골치 아파 하고 있었다. 이 염세 사상은 얄궂게도, 러일 전쟁 종결 후 10년간의 문학이 이상한 개화를 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이 시기에 그의 최고의, 그리고 가장 침울한 작품을 썼다. 모리 오가이(森鷗外), 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알려주는 걸작군은 주로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 시기는 또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가 그들에게 최초의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을 발표한 때이기도 했다.
항의는 정당했다. 그러나 너무나 시기상조여서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시대는 필사적으로 일본을 일대 공업국으로 만들려 하던 때였다. 아시오 지방의 광부와 농민들이 받은 피해는, 어쩌면 천황을 비롯한 정국 담당자들에게는 국가적 중요성에 비춰볼 때 사소한 일로 무시되었을지 몰랐다. 1907년의 폭동 진압 때에는 폭동을 선동하고 광산의 자산에 손해를 끼친 죄로 광부 28명이 투옥되었다. 같은 해 6월, 에히메(愛媛) 현의 구리 광산에서 광부들이 임금 감액을 놓고 봉기한 끝에 역시 보병 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7월, 후쿠오카 현의 탄광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나 갱부 420명 이상이 사상했다. 천황은 이재민 구제를 위해 현에 1천2백 엔을 내렸다. 천황은 또 시종을 파견해서 상황을 시찰하게 했다. 계속되는 이런 사건들은 그 시대의 음울한 공기를 빚어내는 한 원인이 되었다.
안중근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다. 안중근이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인물은 의심할 나위 없이 메이지 천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안중근의 가장 통렬한 고발 가운데 하나는, 이토가 의도적으로 천황을 기만했다는 것이다. 안중근에 의하면 천황이 바라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예속 따위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이었다. 안중근이 천황의 생각을 알게 된 것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선언한 선전 포고서에서였다. 안중근은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수많은 승리 기사를 읽고 기뻐했다. 백화의 앞잡이인 러시아의 패배를 한국과 청나라 동포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함께 기뻐했다고 안중근은 말하고 있다. 안중근이 오직 하나 유감스럽게 여겼던 것은 러시아가 전면 항복하기 전에 일본이 전쟁을 중단한 일이었다.
안중근에 대한 대우는 러시아 측으로부터 일본으로 인도된 시점에서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검찰관인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는 조사가 끝나면 언제나 안중근에게 입에 무는 부분을 금종이로 만 긴구치(金口)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피우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미조부치는 안중근에게 공감을 표시했다. 반생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안중근이 이토의 죄상 15개조를 밝혔을 때, 미조부치는 놀라면서 “이제 진술을 듣고 보니 동양의 의사(義士)라 해야 할 것이다. 의사가 사형을 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인 감옥 관계자들 역시 안중근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야말로 일본에서 고래로 영웅으로 불리던 인물들의 행동과 비견되는 그의 행동과 태도가, 그들의 심금을 울려놓았던 모양이다. 새해가 되자 안중근 및 공범자로 체포된 두 명의 한국인은 설음식을 대접받았다. 안중근은 정월 사흘 동안을 일본식 떡국을 먹고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중근의 힘차고 분방한 필치는 그를 체포한 쪽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안중근은 그들을 위해 50축 이상의 휘호를 써주었고, 그 모두에 ‘어여순옥중대한국인안중근서(於旅順獄中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서명했다.
사형 날짜는 3월 26일로 결정되었다. 안중근은 항소하지 않았다. 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했다. 안중근은 형의 집행을 2주간 연기하는 것을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집필 중인 ??동양 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몰랐다. 안중근은 간수인 구리하라 데이키치(栗原貞吉)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구리하라는 깊이 동정은 하면서도 사형 날짜를 변경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마지막 부탁으로 안중근은 죽음을 맞이할 옷차림으로 흰 비단 한복을 원한다고 했다. 구리하라는 그 부탁은 들어주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안중근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낙심해서 구리하라는 뤼순 감옥의 간수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현재의 우리 눈으로 볼 때, 한국을 일본에 합병한다는 결단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은 중대한 과오를 범했음을 알 수 있다. 한일 합병이 상호의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 한국인은 지금까지의 외교 경험에 비추어 이런 일을 예견했어야 했다. 외국(일본)을 위한 이익은 언제나 한국인에게 번영을 가져다주려는 그 어떤 욕구보다 우선한다는 것, 그리고 또한 이런 사실도 알고 있어야 했다. 설사 그들의 명목상의 국왕이 쾌적한 은거 생활을 누리는 일이 허용된다 하더라도, 한국 대중은 착취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근대 문명의 모든 방면에서 한국인보다 진보해 있던 일본인은 틀림없이, 그리고 주저 없이 그 우월성을 이용할 터이니까. 그리고 자국의 정부가 공언하고 있는 목적을 순진하게 믿고 있던 일본인들은 이런 점을 깨달았어야 했다. 총독을 앉히고 한국을 지배하는 군인들은 대륙에서 일본의 다음 단계 침략을 위한 도약대의 기능 말고는, 한국에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소세키까지도 천황의 붕어를 알고 애도사를 썼다. 전국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세키는 치세에 일어난 대변혁을 시종 흔들림 없이 지지해 온 천황에게 애도의 말을 바쳤던 것이다. 소세키는 그의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이들 변혁 중 많은 것에 대해 개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소세키는 달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다. 근대화의 추한 측면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동양의 전통을 외면한 채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라고 끊임없이 강압해 오는 세계에서, 일본이 독립을 보전하고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