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회교리 문헌이 교황, 주교들의 모임, 개별 주교 또는 다수의 조언자가 작성한 것이라면, 그 가르 침은 어떤 권위가 있나요?
이 물음과 관련해서 먼저 생각해 봐야 할 주제는 교회 가르침의 권위가 지닌 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충실한 제자가 되라는, 곧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헌신하며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많은 신자들은 그러한 문헌을 누가 썼는지 궁금해합니다.
‘교황인가? 아니면 주교회의인가? 아니면 개별 주교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가르치는가?’라는 것보다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들 권위의 수준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가르침의 내용에서 여러 수준의 권위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 pp. 53-55
11. 사회교리를 형성하는 데 평신도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요?
사회교리 형성에는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평신도 운동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운동들은 사회교리의 통찰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말씀을 삶으로 옮긴 평신도 운동은, 사회적 가르침 가운데 참으로 현명한 것은 어떤 것인지, 수정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응용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하고 파악하게 해주었습니다. 사회교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교회가 사회교리를 구축하고 성찰하는 데 풀뿌리 공동체의 경험, 곧 평신도 운동이 새로운 터전으로 떠올랐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 60
22. 인간의 존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강조하는 데에 힘을 실어주는데, 그보다는 공동체를 더 강조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많은 사람이 잘못 생각하는 근본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할 때에는 언제나 공동체적인 맥락에서여야 합니다. 사회교리에서 인간의 존엄을 주장할 때는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존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교리가 갖는 공동체주의 관점은 밀접하게 형성된 관계망 안에 인간의 존엄을 위치시킵니다. 인간은 자신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그 심오한 결합을 깨달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자신의 본성이 지닌 존엄을 만나 가장 완전한 삶을 살게 됩니다.
--- pp. 89-91
54. 교회는 노동조합을 어떻게 보나요?
짧게 답하면, “우호적으로 보고 있다”입니다. 짐작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대답이 교회와 노동운동의 오랜 역사를 다 말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는 특정 노동조합에 대한 비판, 노동조합의 특정 전략과 실천에 대한 비판, 노동조합이 계급 갈등과 분열을 초래할 때 생길 수 있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노동자들이 권리를 보호하고 합당한 사회적 재화를 찾기 위해 연대의 정신으로 결합하는 것을 사회교리는 기본적인 권리로 옹호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은, 투쟁 중에 폭력과 계급 간의 증오를 부추기거나, 또는 노동조합이 요구사항은 내세우면서도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든 교회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신자들에게 그 같은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이론으로나 실천으로나 사회교리는 모두 노동조합 운동이 사회변화를 일으키고 기본 권리와 공동선을 보호하는 능동적인 힘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pp. 189-191
84. 가톨릭교회는 잘사는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가 우리 시대의 거대 악이라고 가르친다고 하는 데, 사실인가요?
계속해서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교회가 오랫동안 기울인 절박한 관심사입니다. 사회교리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문제에 엄격한 동등함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룹들 사이의 격차가 일치에 대한 교회의 주장이 공허할 정도로 커지게 될 때, 신학적 위기의 경종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세계의 부가 절대 수치에서 증가하고 있지만 불평등도 증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독한 불평등이 지속되는 것은, 베네딕토 교황의 표현대로, “부당하고 원망스러운 불균형”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을 경험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마도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 사이의 불평등 문제를 사회교리의 주요 관심사로 삼을 것입니다.
일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이 뜻을 증언하는 일치의 성사(표지)가 되는 것을 그 소명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질서 안에 있는 이 심각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종교적 소명과 연결됩니다.
--- pp. 288-290
96. 사회교리는 사형제도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오랫동안 사회교리는 사회의 공동선을 수호하기 위하여 국가가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무력 사용의 권리를 갖는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주장은 가톨릭의 정치 이론에서, 그리고 공공질서를 수호하는 기관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국가 공인 살인행위를 진지하게 재고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사형을 집행하면 죄인의 교화는 불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징벌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와 같이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형보다는 응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다른 형벌을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최근의 사회교리 문헌들은 사형에 관한 이런 경고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비록 국가에게 사형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권리가 절대로 없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현재 미국 상황에서, 범죄인을 죽이는 사형은 현명하지 않으며 정당하지 않은 방법임을 제시합니다. 최근의 교황들은 이런 견해를 지지했으며, 이는 개정된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도 포함되었습니다. 교리서에서 국가가 권리를 갖는다는 원리는 인정하지만, 피고를 사형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이 있는 사건들은 “실제로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극히 드물다”고 가르칩니다.
--- pp. 332-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