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전통주의자들은 남성이 리드하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셨음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성경 본문으로 바울이 디모데전서 2:13에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라고 한 말에 호소한다. 그러나 계층구조란 개념은 바울이 사용한 “먼저”라는 언어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해석은 바울의 사고에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을 이입시킨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해석하면 서구적 사고방식에 기울지 않기란 어렵다. 실제로 바울은 단지 10개 절 뒤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프로톤…에페이타(pr?ton...epeita)를 사용한다. 바울은 집사들을 “먼저”(pr?ton)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eita) 그들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라고 말한다(3:10). 게다가 “먼저-그 후에”(pr?ton...epeita)를 “지도자-추종자”(leader-follower)의 의미로 보는 것은 신약의 용법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먼저-그 후에”가 다른 곳에서는 단지 시간 또는 사고에서 일련의 사건을 규정짓기 때문이다.
--- 「1장 “평등주의적 관점”」 중에서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는 남성의 헤드십에 대한 암시가 있다. 타락 이후의 가부장제는 명백한 규범이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죄로 말미암아 애정이 깃들고 자애로운 제도로서 의도되었던 것이 너무나 자주 학대하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구약 전체에 걸쳐 명확하게 명령하시거나 권하실 때, 우리는 한 역할?제사장직?을 제외하고 종교적 리더십의 모든 역할에서 여성을 본다(비록 때때로 매우 드물지만). 제사장은 인간에게 죄 용서를 이뤄주는 희생제사를 감독하는 직분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심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인간 종교 지도자로서 적절하게 묘사될 수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수많은 반문화적인 방식으로 여성을 격려하고 양성하시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그는 그의 가장 가까운 사도 그룹 12명을 구성하는 데는 어떤 여성도 선택하지 않으신다. 사도행전에서 여성이 초기 교회의 중요한 리더십 역할을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다. 어떤 여성도 결코 장로-감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서신서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규정적인 본문에 이를 때, 우리는 가장 그럴듯한 종합이 바울이 유일한 한 직분?장로나 감독의 직분?으로부터 여성을 제한하였다는 것임을 발견한다.
--- 「2장 “상보주의적 관점”」 중에서
구약에서 진짜 여예언자들은 미리암(출 15:20), 드보라(삿 4:4), 훌다(왕하 22:14; 대하 34:22), 그리고 이사야의 아내(사 8:3)를 분명히 포함했다. 신약에서는 안나(눅 2:36)와 빌립의 딸들인 네 처녀(행 21:9; 그 문화에서 그들이 처녀라는 것은 아마도 그녀들의 젊음을 암시했을 것이다)를 포함했다. 바울은 여예언자들이 초기 기독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가정하는 것 같다. 사실 그는 여성의 머리가 가려져 있으면, 그들이 공공연하게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모두 긍정한다(고전 11:4-5). 누가는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거의 남성들에 관하여 보고하는 만큼이나 자주 여성들에 관하여 보고하는 데서 특별한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을 보여준다. 그는 요엘 2:28-29에 대한 베드로의 영감 있는 해석을 이야기한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이 그의 영을 부어주실 때, 여자들과 남자들은 모두 예언할 것이다(행 2:17-18). 이사야 61:1-2이 누가복음(눅 4:18-19)을 위한 전형적인 본문이었던 것만큼이나 이 본문은 사도행전을 위한 전형적인 본문이다. 신약 교회의 증인은(비교. 행 1:8) 계급, 성별, 나이, 또는 (가장 놀랍게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인종에 관계없이 구약의 예언적 겉옷(prophetic mantle; 일반적 의미로)으로 특징지어진다.
--- 「3장 “또 다른 평등주의적 관점”」 중에서
교회 전통이 절대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버려져서도 안 된다. 그 추정에 의거한 증거(presumptive evidence)는 “새로운 해석”에 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화적 콘텍스트에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 선조들에게 명확했던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용된 논증 중 일부가 설득력이 없다 하더라도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고 수 세기에 걸쳐 교회?동방과 서방 교회와 남방과 북방 교회 모두에서?가 승인한 해석은 인상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여성이 제사장이나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신앙고백의 장벽을 초월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개신교인, 교회의 다양한 정교회 분파,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 전체에 걸친 견해였다. 물론 이 모든 그룹이 틀릴 수도 있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다. 그러나 입증의 책임은 확실히 새로운 해석을 촉진시키는 사람들에게 있다. 이는 특히 그 새로운 해석이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스트 혁명의 뒤를 바싹 따라가기 때문이다. 일부 페미니즘의 긍정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예, 동일한 노동에 대한 동일한 급료와 여성을 인간으로서 대우하는 것에 대한 강조), 그 운동이 대체적으로 선을 위한 힘이 되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4장 “또 다른 상보주의적 관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