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승사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그리워하던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리워하던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고.
꽃 몽우리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그런 계절의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길게 드리운 벚나무 가지 아래.
그곳에 네가 있었다.
“정희완.”
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
발이 우뚝 멈췄다.
시선이 그 자리에 못 박히고.
의식보다 본능이 먼저 너의 이름을 토해 냈다.
“……김나무……?”
“너, 여전히 발음이 엉망이네. 내 이름 그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며 웃는데, 그 모양이 거짓말처럼 뚜렷해서 손을 뻗으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걸까 생각했다. 네가 내 앞에 있을 리가 없다. 이다지도 생생히, 질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선명히 내 눈앞에 있을 리 없다.
왜냐면 너는, 너는 이미 오래전에…….
“두 번이야.”
“뭐……?”
“앞으로 두 번. 두 번만 더 불러. 그럼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
나로 인해 죽었으니까.
“불러. 내 이름.”
내가 죽기 일주일 전, 네가 내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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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엔 일단 마트부터 가야 해. 달랑 일주일이라도 먹어야 살 거 아냐. 이대로는 시간 되기도 전에 굶어 죽겠다.”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 빨리 죽으라며.”
한시라도 빨리 남은 두 번을 마저 채우고 죽어 편해지라더니 이제 와서 굶어 죽을까 봐 걱정한다. 이상한 논리다.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와 너에게로 날아갔다.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 그랬지.”
네가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목소리가 바짝 다가붙었다. 너는 곧잘 그랬던 것처럼 바투 다가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그건 보기 싫다.”
왜. 그렇게 물으면 너는 무슨 표정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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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본 새 아주 술고래가 다됐네.”
“어른이니까.”
나는 살아남아 어른이 되어 버렸다. 너는 죽어 어른이 되어서 내게 돌아왔다. 툭 내뱉은 말에 네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다 알코올 중독자 치료 센터에서 말년 보낼 일 있냐.”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일주일도 안 남았다며.”
“그럼 지금 할래?”
그 찰나, 돌아보는 네 표정이 선득했다.
“불러.”
“…….”
쉬운 일이다. 단지 이름을 부르는 것, 두 번. 그게 뭐라고. 그러나 나는 발을 재촉해 너를 지나쳐 빠르게 걸었다. 적어도 지금은 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그건 너무, 너무나 쉬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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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왜.”
“고집 세고 까다롭고 복잡하고 생각 많은 정희완.”
커다란 손이 불쑥 눈앞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온통 헝클어트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 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
“너를.”
아무리 기다려도 뒷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손은 갑자기 다가온 것처럼 갑자기 멀어졌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나는 연신 손에 들린 술만 삼켰다. 묻고 싶었다.
너는, 나를.
……미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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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부르고 싶다. 네가 실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 딱 세 번, 그 순간 사라져 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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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도망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기억 속에 여전히 네가 있다. 모두 지워 버리면, 거기에 더 이상 ‘나’는 남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그저 소리 죽여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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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널 좋아해도 상관없겠네.”
멀리, 퍼레이드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너는 손을 내밀어 내 뺨을 감쌌다. 달큼한 숨결이 금방이라도 닿을 듯이 다가왔다. 호흡이 뒤섞인다. 닿으려는 찰나, 망설이듯이 네가 멈췄다. 괜찮아? 묻는 것처럼. 나는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입술이, 맞닿았다.
세상의 모든 소란이 아득히 빨려 들어간다.
이대로 지구가 멸망한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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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그냥 말이나 해 볼 걸 그랬다.
야, 그거 아냐? 사실 내가 너 좋아한다. 그것도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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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잎이 하늘하늘 네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새 취기가 도는지, 네 얼굴이 조금 붉었다. 아아. 망했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는데.
여전히 너는 내 눈에 예뻤다.
“정희완.”
“왜.”
“고집 세고 까다롭고 복잡하고 생각 많은 정희완.”
네가 어째서 고집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걸 거부하는지 알고 있다. 어떻게 모를까. 너랑 붙어 산 세월이 얼만데.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런 충동이 들었다.
“너를.”
좋아한다. 그러나 말은 입안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어떻게 그러겠어. 너는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고 나는 죽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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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죽게 놔둘 리가 없잖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차마 끄집어 내지 못한 말이 또다시 몸 안을 헤매다 흩어져 간다. 나는, 그저 웃는 것 외에는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 좋아한다. 말하고 싶다. 좋아해. 말하고 싶어.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