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해 본 철학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철학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성경 본문을 활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포함하는 것이다. 단순히 성경 본문이 제시하는 피상적인 내용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을 조명하는 것이다. 이 경우 철학은 신학의 단계로 나아간다.
--- p. 23.
그리스 원정을 실패한 페르시아는 승리하여 다양한 전리품을 얻으려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전쟁을 준비하느라 국고마저도 바닥을 드러냈다. 왕후 와스디를 폐위한 후 전쟁을 치렀던 왕은 이제 제국의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왕비를 구했다. 그동안은 왕비가 없어도 후궁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이제 전투에 패배한 제국의 기강을 새로이 하기 위해서는 왕후의 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곱 명의 어전 내시에게 명령하여 나라 전체에서 가장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며 새로운 왕비를 뽑으려 했다.
--- p. 45-46.
도덕적 상대주의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도 회의적인 태도를 유발하므로 종교적 권위는 배척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자연에 대한 관심을 인간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인식의 조건과 가능성, 한계 등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갖추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p. 53.
실재론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질서와 법칙에 관한 핵심적 지식을 다듬어 학교를 통해 조직적으로 전승하는 것을 장려함으로써 교육의 역할을 강조했다. 기독교교육에 있어서는 아름다운 질서와 법칙의 창조자인 창조주의 섭리를 음미하고 따르도록 권면했고, 일반 교육에서는 확고한 인생관과 세계관 위에서 조화로운 이성을 계발하도록 인도하였다. 실재론의 교육 목적은 이성을 계발해서, 이성에 따라 삶을 질서있게 영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식을 탐구할 수 있는 기능과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의 역량을 강조했다.
--- pp. 61-62.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당시에는 별도의 신학이나 종교 철학이 필요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 자체가 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깊은 숙고가 곧 기독교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역을 체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제자들마저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게 되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할 필요가 생겼고, 기독교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정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 p. 64.
오늘날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양의 정보, 소위 빅데이터(big data)를 가공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 p. 77.
17-18세기의 합리론과 경험론, 그리고 계몽주의 철학(Enlightenment Philosophy)은 인간의 지식 구성을 이성과 경험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이는 신앙에 대한 적용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고, 창조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셨다.
--- p. 92.
예수님의 그 말씀은 칸트의 정언명령과도 같다. 그리고 그 말씀은 율법교사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이다. 죄악된 세상, 그리고 급변하는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매일 강도를 만나는 치열한 삶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罪性)은 서로에게 강도짓을 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죄악의 끊임없는 사슬을 끊어버리는 힘은 그리스도에게만 있으며, 그러한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이라는 은혜를 베풀 수 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주일성수, 전도, 십일조를 강조하는 마음의 이면에 교회를 성장시켜서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의 주장은 칸트의 기준에 의하면 가언명령(hypothetical imperative)에 불과하며,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다를 바가 없는 인물인 것이다.
--- pp. 99-100.
마르크스주의는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과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하였으나 결국 인간의 죄성을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이를 바탕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p. 104
1982년 1월 5일 야간 통행 금지를 폐지하고, 술집, 모텔, 성매매 업소 등 유흥업소가 폭증하는 것을 좌시함으로써 정치적인 관심을 성적인 일탈 조장으로 무마하려고 하였다. 당시 군사 정권은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OB동재파,” “양은이파,” “서방파” 등 전국 3대 폭력 조직이 성장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비판이론은 이와 같이 사회의 구조나 정치 권력을 통한 비인간화를 고발하고, 인간을 예속시키는 환경에서의 해방을 추구한다.
--- pp. 106-107
제임스는 제1의 원리나 궁극의 범주 등은 대개 사고에 방해가 되기 일쑤라고 지적하며, 이는 마음을 해이하게 하여 실험적, 탐구적 태도를 희석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과거의 최선의 진리들도 끊임없이 재검토되어 보강되고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의 유한한 경험을 초월한 실재들에 대하여 사사로이 품은 몽상조차도 그 몽상을 품은 이에게는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며 생명이 언제나 논리보다 우월함을 강조하였다(James, 1909). 그는 인생에 유용한 결과를 가져오는 가설들은 거부해서는 안 된다며 다른 사람들의 여러 가지 행태를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하여도 이를 관용할 것을 주장하였다(James, 1907).
--- pp. 118-119
유신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실존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토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4 이 세상을 너무 만만하고 호락호락하게 보는 것도 문제이고, 너무 어렵고 힘들게만 보는 것도 어리석은 태도이다. 또한 이 세상을 너무 죄악시하고 부정하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고, 장밋빛 환상으로만 가득한 긍정적 신앙을 강조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 세상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는 곳이다. 아직 천국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죄성으로 얼룩진 고난과 이에 따른 희로애락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시험은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처럼(창 22:1-19)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주시는 경우가 있다.
--- pp. 134-135
그들은 철학이란 결국 현실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실제적 용법을 기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현재 사용되는 문자의 의미를 떠나서는 진정한 개념을 파악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복음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역시 현대인들의 귀에 들리고 지적으로 용이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가다듬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복음에 빚진 자의 사명은 때로는 단순히 외치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수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 p. 143
지식은 머리로 아는 것이고, 지혜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토대로 마음으로 결단하고 참된 지식에 순종하는 것이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출생을 통해 무엇이 참된 지혜인지를 배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지혜, 즉 “듣는 마음”을 구하였다(왕상 3:9).
--- p. 147
사사기의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실에 눌려 자신의 힘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려다 보니 가나안 땅도 제대로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나안의 신을 섬기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세상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또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성으로 인한 혼란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주관성에 함몰되어 자신에게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현실이기도 하다.
--- p.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