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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

알마 인코그니타이동
우밍이 저 / 허유영 | 알마 | 2018년 03월 2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0 리뷰 8건 | 판매지수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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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3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248쪽 | 372g | 130*213*20mm
ISBN13 9791159921421
ISBN10 1159921423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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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상창中華商場은 총 여덟 동이었고 각각의 동은 충忠, 효孝, 인仁, 애愛, 신信, 의義, 화和, 평平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우리 집은 애동과 신동 사이에 있었다. 애동과 신동 사이에도 육교가 있었고, 애동과 인동 사이에도 육교가 있었다. 나는 애동과 신동 사이에 있는 육교를 좋아했다. 그 육교가 더 길었기 때문이다. 육교의 다른 쪽 끝이 번화가인 시먼딩西門町과 연결되어 있어 육교 위에 온갖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스크림, 아동복, 샤오빙燒?, 와코루 속옷, 금붕어, 거북이, 자라, 심지어 ‘바다스님’이라는 이름의 파란 게를 파는 노점상도 있었다. ---「육교 위의 마술사」중에서

맞은편 남자는 분필로 바닥에 둥근 반원을 그려놓고는 그 안에 검은 깔개를 펼치고 물건들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그가 무얼 팔러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포커, 쇠고리, 이상하게 생긴 공책 등등…. 누나에게 들으니 그 남자가 파는 것이 마술 도구라고 했다. 맙소사, 마술 도구를 판다고? 내 좌판의 맞은편에 마술 도구를 파는 사람이 있다니! “아냐. 난 마술사야.” 남자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 물건들을 어디서 떼어 오느냐고 묻자 그는 “내 마술은 전부 진짜야”라고 말했다. 그가 제 짝이 아닌 듯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도마뱀을 닮은 눈으로 나를 힐긋 쳐다보자 저절로 뒷덜미가 선득해졌다. ---「육교 위의 마술사」중에서

“그 전날 밤에는 옥상에 숨어 있었는데 내가 혼자 있는 걸 보고 마술사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 왜 그랬는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 얘기를 그 사람한테 다 털어놨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러더라. 정말로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어버리고 싶으면 그 변소 칸에 가서 99층 버튼을 누르라고.” ---「99층」중에서

나는 그녀의 눈, 옆모습은 물론 그녀 몸의 다른 곳에도 매료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것이 나의 첫사랑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페이페이 방의 열쇠는 복제하지 않았다. 설령 열쇠를 복제하기만 하고 그 열쇠로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나쁜 짓이었다. 페이페이 방의 열쇠는 오직 그녀만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사자는 그 일들을 기억할까?」중에서

내 눈에 띄었다는 걸 알고 급하게 떠나버린 남자의 뒷모습이 우리 아빠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니, 그때 나는 그가 아빠라는 걸 확신했어. 어릴 적 아빠는 엄마와 싸울 때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매몰차게 몸을 돌려 나가버렸지. 그러다가 우리 둘만 남아 서로 대화를 하지 않게 된 후로 아빠는 나만 보면 불가사의할 만큼 단호하게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어. 그래서 얼굴을 보지 않고 뒷모습만으로도 아빠를 알아볼 수 있었지. 가끔은 얼굴을 보지 않을 때 상대의 슬픔을 더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어. 사람의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슬프고, 사람의 걸음은 눈빛보다 더 슬픈 법이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중에서

이상하게도 그 후 얼마 동안 코끼리 분장을 할 때마다 만약 내 생활에 다시 개입한다면 거부하고 싶은 먼 기억
속 사람들이 자꾸만 내 앞에 나타났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주산 대회에서 내게 큰 상처를 주었던 수학 선생님, 고등학교 때 몰래 짝사랑했던 여대생, 초등학교 때 육교에 있던 그 추레한 행색의 마술사…. 내가 그렇게 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줄은 나도 몰랐어. 잘라도 계속 또 자라는 머리카락처럼 자질구레한 일들을 말이야. 넌 그게 다 어디에 숨겨져 있었는지 생각도 못할 거야.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중에서

한번은 아허우가 양복점 앞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데 안경점 안에 있던 샤오란 누나가 밖으로 나와 치러우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안경점 안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몇 초마다 한 번씩 아허우가 있는 쪽을 흘끔거렸다. 나는 별안간 밀려난 기분이 들었다. 열한 살짜리 소년은 열아홉 살 남자와 경쟁할 수 없었다. 굴욕감이 나를 덮쳤다.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굴욕감이었다. 적어도 그 나이의 나는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조니 리버스」중에서

탕씨 아저씨의 양복점에는 다양한 색깔의 양복천이 있었지. 옷감 두루마리를 줄지어 세워놓았는데 각 옷감마다 작은 비닐 상표가 붙어 있었어. 제조사에 따라 디자인과 영어 글씨가 모두 달랐는데 우리 동 애들은 누가 더 희귀하고 근사한 상표를 모으는지 경쟁을 했어. 학교에 다녀오다가 탕씨 아저씨의 양복점 안을 휘 한 바퀴 돌며 아저씨에게 새 상표가 있느냐고 물었지. 하지만 새로 풀린 옷감이 없는 날에는 새로운 상표도 없었어. 흔치 않은 상표일수록 점수가 높았어. ---「탕씨 아저씨의 양복점」중에서

아카가 귀국했을 때 중화상창은 이미 철거되고 없었어요. 중화상창의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걸 아쉬워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기억들이 재가 되어 연기처럼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더니 10년 전부터 중화상창의 미니어처를 제작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이미 아카의 폐는 화학 페인트를 너무 많이 흡입한탓에 병변이 시작되고 있었어요. 얼마 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자 아카는 모든 수입을 자신에게 쓸 수 있게 됐고 그때부터 벽돌, 기와, 점포 하나하나까지 직접 손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총 여덟 동 중 네 동 반밖에 만들지 못하고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물처럼 흐르는 빛」중에서

마술사가 옥상을 떠나던 날, 이른 새벽에 배가 아파서 일어나 변소에 똥을 누러 갔다. 변소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코를 훅 덮쳤다. 그게 어떤 냄새였는지 지금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단, 그때까지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인 건 분명했다. (...)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술사가 변소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을 볼 수 있는 두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웃고 있는 듯 무표정한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자귀나무 아래의 마술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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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는 사라진 순간을 소환하는 작품이다. 우밍이의 펜 끝에서 탄생한, 쓸쓸하고 신비하고 따뜻한 타이베이 이야기는 독자들을 그 비바람 불던 시대로 데려다 놓는다. 그 시대의 타이베이는 불을 환히 밝히고 있는 고독한 배였다. 빛은 찬란하지만 그 속에 외로움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마법 같은 책이다. 모든 세대가 폭력적이고 각박한 언어에 길들여져 있는 이 시대에, 믿음 대신 미움에 더 익숙하고 시대를 향한 멸시의 눈빛이 자랑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오래전 중화상창에 그 시대의 질감과 온도를 그대로 재현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한 소년이 있었음이 무척 다행스럽다. 우리는 그의 선량하고 너그러운 눈을 통해 그 시대와 그 시절의 생활상을 회고하고 타인과 우리 자신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커위펀 (작가, 대만국립정치대학 신문학과 부교수)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처럼 진실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을 만난 건 무척 오랜만이다. 타이베이의 지도에서 사라진 지 20년이 된 중화상창은 ‘육교’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공간이었다. 중화루와 철로 주변에 길게 이어져 있던 상가 여덟 동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은 아마도 중화상창과 타이베이 최대 번화가였던 시먼딩에 향수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독자들은 이 아홉 편의 성장 스토리 속 주인공과 함께 집을 떠나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30여 년 동안 타이베이의 랜드마크였던 ‘중화상창’이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이유는 그곳이 현대화 과정에서 타이베이의 사춘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밍이는 몇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30년의 기억을 섬세한 필치로 소환했을 뿐만 아니라, 소시민이 겪었던 시대와 사회의 변천을 회상하고 그들의 애환을 이야기했다.
- 장다춘 (소설가)
우밍이의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렇게 입체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소설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진솔한 생활을 통해 생생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제도권 교육만 받고 자란 작가라면 결코 이런 소설을 써내지 못했을 것이다. 평면적인 문단에서 홀로 우뚝 선 훌륭한 소설이다.
- 황춘밍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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