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슬픈 기분으로 불길한 하늘과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지난여름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홀연 그는 환영처럼 아카시아 가지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속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았다…. --- p.14~15
“그들은 1년 반 전에 죽었는데. 1년 반 전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어. 그런 사실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지. 속임수에 넘어가면 안 돼! 이건 덫이야. 알겠어? 덫이라고!” 후터키는 듣고 있지 않았다. 벌써 외투의 단추를 잠그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걸 보게 될 거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의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후터키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슈미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는 말했다. “이리미아시는, 위대한 마법사라네.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을 지을 수도 있지.” --- p.35
“그자들은 여전히 더러운 의자에 주저앉아 저녁마다 감자 요리나 먹으면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의아해하고 있을걸. 의심에 가득 차 서로를 감시하고 조용한 방에서 큰 소리로 트림이나 하고. 그리고?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끝도 없이 기다리다가, 누군가 자기들을 속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겠지. 돼지를 잡는데 혹시 뭐 주워 먹을 거라도 떨어질까 싶어 바닥에 배를 댄 채 도사리고 앉아 기다리는 고양이처럼 말이야. 그자들은 옛날 성에서 시중을 들던 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주인은 벌써 머리에 총알을 박고 자살했는데, 저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체 주위에서 우왕좌왕하는 거야….” --- p.71
그는 모든 것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하찮은 세부라도 놓쳐선 안 되었다.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간과하는 것은 몰락과 질서 사이에 놓인 흔들리는 다리 위에 아무런 대책 없이 서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담배 부스러기나 야생 거위가 날아간 방향이나 별 뜻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 같은 것들도 그 연결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관찰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도 어느 날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서 저 끊임없이 무너져가는 질서의 말 못할 포로가 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 p.88
끝나가는 시월의 밤은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이나 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질서에 따라 나무들을, 비와 진창길을, 노을과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근육을, 정적을, 구부러진 길과 풍경을 두들겼다. 머리카락은 무리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몸과는 다른 리듬을 따랐고, 성장과 몰락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수없이 두들기고 되울리는 한밤의 소리들은 짐짓 절망을 가리는 한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한 장면 뒤로 불현듯 또 다른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눈에 보이는 경계를 넘어서면 현상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졌다.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처럼, 틈이, 균열이 있었다. --- p.132
불행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들을 비켜 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후터키 역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슈미트의 요지부동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리미아시가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맹목적인 희망 자체가 그 어떤 가능성들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오직 이리미아시에게만 농장 사람들이 포기하여 내버린 일들을 다시 건져 올릴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인데, 그걸 갖지 못하게 된 게 무슨 대수랴? --- p.195
아코디언의 비단결 같은 곡조를 타고 거미들이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다. 거미들은 술병과 유리잔, 찻잔과 재떨이에 느슨하게 거미줄을 드리웠고, 테이블 다리와 의자 다리를 가느다란 실로 은밀히 연결했다. 마치 눈에 띄지 않게 그물망을 쳐서 미세한 움직임과 소리라도 즉각 감지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처럼. 거미들은 잠자는 사람들의 얼굴과 다리 그리고 손에도 거미줄을 쳤고, 그런 뒤에 번개같이 은신처로 퇴각하여 거미줄이 미세하게라도 흔들릴 때를 기다리다가, 그러다 다시 거미줄을 칠 채비를 했다. --- p.228
잠을 자지 못한 근심 어린 눈들에 눈물이 배어 앞이 흐려졌고,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는 갑작스럽고 은밀하며 불안정하지만 억제할 수 없는 어떤 안도의 표정이 어렸다.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재채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몇 시간 동안 내내 기다려온 것이 바로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라는, 마음을 해방시켜주는 말이었던 까닭이다.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던 이리미아시의 눈빛은 어느샌가 신뢰와 희망, 믿음과 열정 그리고 결연함을 담고서 점점 강철 같은 의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 p.253~254
그는 처량하리만치 누추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기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온 것이 무엇인지를 돌연 깨달았지만, 그 순간의 명료함도 사라지자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지금껏 머물러 살 용기가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떠날 용기가 없었다. 짐을 싸면서, 그는 모든 가능성을 도둑맞고 하나의 덫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덫에 걸릴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기계실과 농장에 갇힌 죄수였지만, 이제는 미지의 위험에 자신을 맡기려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문을 여는 법도 모르고 창문으로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떤 날을 두려워했다면, 이제는 영원한 미지의 수인(囚人)으로서 지금껏 가졌던 것마저 스스로 잃도록 만들었다. --- p.271
“그물 조직이야, 처진 귀!” 페트리너가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이제 알겠나?” 둘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리미아시는 몸을 약간 숙이듯이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이리미아시의 전국적인 네트워크 말일세. 이제 그 머리로도 좀 알겠어? 어디서든 작은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페트리너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처음엔 희미한 미소가 얼굴에 떠오르더니, 이윽고 단추 같은 눈이 반짝였고, 흥분한 나머지 나중엔 귀까지 붉어졌다. 그의 온몸이 어떤 전율로 떨리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있으면 즉시… 어디서나… 뭔지 알 거 같군.” 그가 속삭였다. “정말 환상적인 생각이야.” --- p.307
주위에 바람이 일자, 눈이 멀어버릴 것같이 하얀 시신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참나무 꼭대기쯤에 이르러 옆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주춤주춤 땅으로 내려와 다시 빈터에 내려앉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몸 없는 목소리가 성난 원망의 소리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죄 없는 불운에 체념하는, 불만에 가득한 합창이었다. 페트리너가 헐떡거렸다. (...) “뭐 좀 물어봐도 되겠나?” “어서 말해봐!” “자네 생각엔….” “응?” “지옥이 있을까?” 이리미아시가 침을 삼켰다. “누가 알겠나. 어쩌면 있겠지.” --- p.317
“여긴 뭐가 이래? 통행금지인가?” “아니, 가을은 원래 이렇지.” 이리미아시가 슬픈 어조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난로를 껴안고 앉아 봄이 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아. 날이 저물 때까지 창가에서 어정거리다가 그다음엔 먹고 마시고 솜털 이불 아래서 껴안고 잠이 들지. 이때쯤 사람들은 인생이 잘못되어간다고 느껴.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싶을 때는 아이들이나 고양이를 때리면서 좀 더 견뎌내지. 그렇게들 사는 거야, 처진 귀 양반!” --- p.326
모두 무엇에 휩쓸려 그렇게 이성을 잃고 먹이를 다투는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영원히 희망이 없을 것만 같던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드디어 황홀한 자유의 공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창살에 갇힌 죄수들같이 날뛰며 새로운 현실을 부정하고 절망했는지, 어째서 미래의 보금자리에서마저도 자신들이 등진 위안 없는 몰락과 더러움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리라는 약속을 망각해버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들처럼 이리미아시를 에워싸고 서 있었다. 해방의 감각보다도 더 뿌리 깊은 것은, 어쩌면 그들의 수치심일 터였다. --- p.345~346
그는 저택의 문가에 이리미아시가 서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이미 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깨닫고 놀란 심정이 되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희망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이미 저택에서부터 그는 이리미아시의 말 뒤에 숨겨진 괴로움을 감지했다. (...)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리미아시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어떤 충동이, 즉 이전의 불꽃이 다 타버려 사라진 것이다. 그가 무슨 시늉을 하건 그것은 이제까지 해오던 무언가의 관성에 불과한 것이었다. --- p.355
“그래, 기막힌 하루였네, 그렇지?” 다른 서기가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랬어. 빌어먹을!”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알아주기만 해도 좋겠는데 말이야.” 서기 하나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알아주지 않지, 조금도.” “그래,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 먼저 말을 꺼냈던 서기가 고개를 저으면서 동조했다. 그들은 다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현관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고 있었다. “힘든 하루였나요, 여보?” 그들은 따뜻한 실내로 들어서며 조금 진저리를 쳤고, 피로감을 느끼면서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별건 없었소. 맨날 그렇지, 뭐.” --- p.376
그는 열에 들뜬 것처럼 철자와 철자를 이어나갔다. 그는 모든 것이 글에 쓴 그대로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는 자기가 쓰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깊이 확신했다. 수년 동안 고통스럽고 끈질기게 이어온 작업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졌다. 그는 이제 유일무이한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 능력으로 끊임없이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세계를 묘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도까지는 혼란스러운 사건들 배후의 메커니즘에도 간섭할 수가 있었다.
--- p.386~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