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마르셀 모스
「기부론」이 집필된 1920년대 초반은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모스는 인간의 도덕적 감성 타락에 상당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인간 행위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경제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그 결과 사람들의 관계는 교환가치에 매몰되어 점점 더 피폐해지는 상황이었다. 요컨대 인간들이 점차 ‘계산기’만을 두드리는 ‘경제 동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모스는 진단했던 것이다. 모스는 이러한 상황을 절망적으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부 고대사회에서 널리 행해졌던 하나의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외적으로 보아서는 경제적 이성의 지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행위, 바로 기부 행위가 그것이다.
인류학자였던 모스는 기부 행위의 기원을 원시시대 포틀래치 풍습에서 찾았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포틀래치 풍습이다. 이렇듯 그는 나누는 행위에는 답례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세 가지 의무가 있는데, 주어야 하는 의무, 받아야 하는 의무, 그리고 답례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원시 사회의 종교적, 법적, 경제적, 신화적 측면들이 모두 어우러진 ‘총체적인 사회현상’으로 고찰한 기부론은 매우 흥미롭다.
※ 2. 조르주 바타유
요컨대 바타유에게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확히 이와 같은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은 그 자체로 소비 개념을 중심으로 정립된 바타유의 일반경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결국 에로티시즘에 참여하는 쌍방의 주체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원하는 황홀감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행위가 곧 ‘기부 행위’이고 ‘소비 행위’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이해된 에로티시즘은 ‘금기’와 ‘위반’ 혹은 ‘전복’으로 요약되는 바타유의 정상의 윤리가 구현되는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영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지금까지 살펴본 바타유의 사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상의 윤리는 『저주받은 몫』을 통해 확인되는 바타유의 기부론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타유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순수 기부, 즉 완전히 자발적이고 비경제적인 기부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부자는 과연 자신의 기부에서 이와 같은 극한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을까?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바타유의 기부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타유의 정상의 윤리는 더 높은, 아니 가장 높은 산에 오르려는 등산가에 비유할 수 있다. 극한을 체험하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노력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바타유는 원시사회의 ‘제한경제’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일반경제’를 대비시킨다. 경제 중심이 ‘생산’에서 ‘소비’로 전환되었으며 인류는 본격적으로 재화를 축적하게 되고 이때부터 전쟁, 축제, 도박, 예술 등 대규모 소비가 수시로 행해졌다고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금이 고귀한 빛을 발하듯, 주권적 개인은(자율적이고, 외적은 환경에 거리를 둘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신과 같은 변제 불가능한 베풂을 행할 수 있는데 이로써 맛보게 되는 지고의 황홀감이 순수한 기부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 3. 자크 데리다
기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부 수혜자나 기부자가 기부를 기부로 지각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기부를 의식하거나 기억하지도 말고 또한 그것을 인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기부를 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망각은 망각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철저해야 한다.
데리다는 앞서 설명된 바타유의 순수 기부 행위를 일종의 광기에 비유한다. 불가능한 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행위는 순수한 기부 행위라기보다는 광기에 불과하지만 그가 행위를 포기하고 멈추었을 때 비로소 행위의 순수성이 드러남과 같은 맥락으로 설명된다.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함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일이 일상에서도 가능한가 하는 점에 대해 데리다는 끝까지 침묵했다고 한다.
※ 4. 장 폴 사르트르
기부에 대한 사르트르의 관심은 이른바 ‘췀명의 기부’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사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벽한 익명 기부의 실천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니까 타인도 모르고 심지어는 행위 당사자인 기부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기부, 즉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는 기부가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데리다는 이와 같은 실천 가능성을 하나님의 절대명령에 복종하면서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인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서 제시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아브라함의 번제와 같은 행위가 일상생활에서도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놓여날 자유가 없다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즉 끊임없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곧 ‘타자’이며, 결국 나를 객체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타자는 지옥”일 수 있다. 특히 기부 행위와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가진 나를 쳐다보는 갖지 못한 자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인식해야하는 나. 동시에 내가 그에게 무엇을 주었을 때 그것을 받으며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공개적인 기부 행위의 부정적 측면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사르트르는 기부 행위자와 기부 수혜자의 관계를 ‘나’와 ‘타자’의 관계로 보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익명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실천방향은 이상적이나 여전히 구체적 방안은 숙제로 남겨놓았지만 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