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들에게 희망을
두산 김현수는 8년 전인 2005년 야구 청소년대표였다. 그때 인천에서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이 열렸고, 같은 기간 2006시즌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도 함께 실시됐다. 대회기간이라 대표팀 동료와 함께 숙소 생활을 하던 김현수는 대표팀 동기들과 우르르 PC방으로 몰려갔다. 그해 8월 31일 열렸던 신인 드래프트는 김현수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는 날이었다. “나도 대표선수인데.” 내심 욕심도 있었다. 이미 롯데가 상위 라운드에서 자신을 뽑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컴퓨터 화면에 하나씩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롯데는 3라운드에서 김현수 대신 덕수정보고의 김문호를 선택했다. 김현수는 6라운드까지 지켜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숙소 방에 누웠다. 같은 방을 쓰던 김문호가 돌아왔다. 김현수는 “문호가 아무 말도 없더라. 지명이 안 됐다는 걸 느꼈다. 문호에게 ‘축하한다’고 해주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정말로 천장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 했다.
대표팀 선수 18명 중 딱 2명만 지명 받지 못했다. 그 중 김광현은 2학년이라 지명 대상이 아니었으니 김현수 혼자만 지명을 못 받은 셈이다. 김현수는 “나중에 롯데·LG·두산 등에서 신고선수로 오라고 연락이 오더라”고 했다. 김현수는 두산의 신고선수가 됐다.
그해 드래프트는 9라운드까지 치러졌다. 류현진을 비롯해 삼성 차우찬, 넥센 강정호 등이 당시 2차지명 1순위 선수들이었다. 그 9라운드 지명 안에 김현수는 끼지 못했다. 하지만 김현수는 2007년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가 됐다. 김현수는 “야구도, 인생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SK 정근우도 2000년 청소년대표였다. 추신수·이대호·김태균·정상호·이동현 등 멤버가 쟁쟁했다. 캐나다 세계선수권에서 우승까지 했다. 하지만 그해 열린 드래프트에서 정근우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정근우는 “나 포함 2~3명 정도가 지명 받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정근우는 리그 최고의 2루수가 됐다. 정근우는 “야구실력은 지명 순이 아니다”라고 했다.
최근 SK에서 맹활약하는 새 얼굴 한동민은 2012년 드래프트 9라운드 전체 85순위에 지명됐다. NC의 중심타자 역할을 하는 신인 권희동도 지난 드래프트에서 9라운드 84순위가 돼서야 지명 받았다. 호쾌한 스윙으로 주목받는 SK 신인 김경근은 권희동보다 3순위 낮은 10라운드 87순위 지명 선수다.
9라운드에 뽑힌다고 그 인생이 9등짜리일 리 없다. 김현수의 말대로 “야구도, 인생도 모르는 것”이고, 정근우의 말대로 “야구실력은 지명 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구는 원래 9명이 9이닝 동안 벌이는 9의 종목이다. 야구의 모든 ‘9’들에게 희망을. 9번째 구단 NC도, 사상 첫 9위에 떨어진 한화도.
2013. 4. 15
164경기 연속 무패 투수
2008년 6월 19일. 우리 히어로즈는 진필중을 방출했다. 진필중은 ‘연습생’이라 불리는 신고선수 신분이어서 웨이버 공시가 아닌 신고선수 등록말소 절차를 거쳤다. 한때 직구와 슬라이더만으로도 리그를 평정했던 마무리투수였지만 옛 추억의 그림자만 남았다. 그리고 이날, 조용히 또 한 명의 투수의 신고선수 등록이 말소됐다.
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지난해까지 16년을 뛰었고 234경기에서 1승1세이브2패. 방어율은 4.77이었다. 뛰어난 성적이라고 볼 수는 없는 숫자. 하지만 그는 프로야구에서 유일한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무려 164경기 동안 단 한번도 패전을 기록하지 않았다. 태평양과 현대를 거친, 왼손 스페셜리스트였던 김민범이다.
물론 상대한 타자가 많지는 않았다. 통산 234경기에서 상대한 타자는 542명, 피안타수는 128개밖에 되지 않았다. 한번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2.3명의 타자와 대결했다. 통산 피안타수가 경기수보다 적은 투수는 김민범 외에 LG 류택현과 마무리투수 삼성 오승환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그렇게 마운드에 오르고도 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능력이다. 김민범은 1999년 9월 26일 수원 한화전에서 7회에 등판했다가 2안타로 2실점해 패한 게 마지막이었다. 이후 164경기 동안 김민범은 패전을 모르는 남자였다.
김민범은 첫 번째 패배를 기억하고 있었다. “대구였다. 볼넷으로 주자를 내보내고 내려왔는데, 문창환이 끝내기 안타를 맞았다”고 말했다. 1994년 9월 11일이었다. 물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유일한 승리의 기억은 “화려하지 않은 야구인생이었지만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라고 했다. 2000년 6월 15일 SK전이었다. 4-4 동점이던 7회말 한 타자를 잡아낸 뒤 타선의 도움으로 행운의 승리를 따냈다.
패전과 승리를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는 김민범은 현재 우리 히어로즈 원정기록원이다. 그라운드를 떠나 그라운드 뒤에서 상대 전력을 분석한다. 사실 지난 겨울, 히어로즈 창단 당시 4000만원이던 연봉이 2000만원으로 절반이나 깎였다. 구단이 차라리 직원으로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김민범은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김민범의 강릉고 동기이자 태평양 입단 동기였던 이재주는 KIA에서 올시즌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재주는 이제 정신 차렸나 보다”라며 조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원치 않는 은퇴는 아쉽지 않을까. 하지만 김민범은 “후회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천년만년 선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라고 했다. 무패 기록을 더 늘릴 수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무패 기록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인생에서 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왼손타자 몸쪽을 파고들던 직구보다 더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프로야구 유일의 164경기 연속 무패의 투수. 김민범의 무패 행진은 그래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2008. 7. 1
사람 사는 야구, 사람 사는 세상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은 매년 세계 최고 리더 50인을 뽑는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5년에는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팀 쿡, 2016년에는 아마존 CEO 제프 베저스가 1위에 올랐다. 2017년 세계 최고 리더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의 테오 엡스타인 사장. 엡스타인은 ESPN을 통해 “나는 우리 집 강아지 배변 훈련도 잘 못 시킨다. (세계 최고 리더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7차전 연장 10회초) 벤 조브리스트의 타구가 몇 인치만 빠졌어도 내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힘들었을지 모른다. 우리 팀 최고 리더는 내가 아니라 바로 선수들”이라고 말했다.
엡스타인 사장은 ‘저주 탈출 전문가’였다. 2002년 겨울, 보스턴의 단장으로 임명됐다. 겨우 만 28세. 메이저리그 사상 최연소 단장이었다. 2년 뒤 팀을 우승시켰고, 1918년 이후 86년간 이어진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2012년 보스턴을 떠나 시카고 컵스로 옮겼다. 100년이 넘은 ‘염소의 저주’팀이었다. 5년 동안 팀을 차근차근 성장시켰고, 지난해 가을 월드시리즈 우승과 함께 108년 걸린 저주를 깼다.
〈포천〉이 엡스타인 사장을 세계 최고의 리더로 꼽은 것은 단지 ‘염소의 저주’에서 팀을 탈출시켰다는 성과 때문이 아니다. 엡스타인이 만든 새로운 팀 스타일에 주목했다. 이른바 ‘사람 사는 야구’다. 메이저리그는 새 측정기술의 발달과 함께 ‘데이터 쓰나미’의 한가운데 있다. 투구 회전수, 타구 발사각도와 속도가 세밀하게 분석된다. 선수들은 훈련 때 각종 장비를 찬 채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당한다. 감춰진 ‘효율’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에게 최적의 움직임을 요구한다. 엡스타인 역시 데이터 야구 선구자였다. 보스턴이 밤비노의 저주를 깬 것은 투구 분석자료의 세밀한 활용 덕분이었다.
그런데 엡스타인은 시카고 컵스로 옮긴 뒤 다른 길을 찾았다. 2012년 첫 스프링캠프, 엡스타인은 구단 전체 워크숍 중 하루 전체를 ‘인성’ 강조에 할애했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앞으로 최고의 정신력, 의지를 가진 선수를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카우트들은 보고서에 선수의 구속과 파워를 적는 대신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적어야 했다. 동료, 상대팀 선수, 친구, 선생님, 가족의 의견이 그 선수의 야구 관련 기록보다 중요했다. 그 선수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어떤 변화구를 얼마나 잘 던지는 것보다 중요했다. 이를 바탕으로 선수들을 새로 뽑았고, 트레이드했다. 앤서니 리조, 크리스 브라이언트, 에디슨 러셀 등은 컵스 우승의 주역이 됐다.
쏟아지는 데이터 속에서 무조건적 효율에 집착하는 대신 새로운 가치를 모색했다. 핵심은 바로 사람이었다. 엡스타인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이를 해결하는 열쇠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팀 동료들과의 관계, 우리 조직 전체와의 관계.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함께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어려운 일을 헤쳐나가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혼자 일하기 싫어하고, 함께하길 원한다. 그게 사람 사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제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 대신, 남을 생각하고 공감할 줄 알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줄 아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게 컵스 성공의 길이었다.
포천이 엡스타인을 세계 최고의 리더로 꼽은 것은 승리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구속, 점수, 승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다. 사람 사는 야구가 만들어내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2017. 3. 27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