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곧 19세기 영미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려 했던 결과물이다. 동시에 신앙고백서이기도 하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서 어떻게 진행되고 무슨 이
유로 갈라졌으며,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현상화되었는지 보고 싶었다. 분명한 것은, 기독교가 한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끼쳤고 어떤 그룹과 비교할 수 없는 공적을 남겼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고 “역사라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 통치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복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세계성이 한국 민족의 명제였던 독립을 이루게 했고 한국 역사를 견인했음을 거듭 확인했고, 동시에 기독교회사를 모르면 한국 역사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올바로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일반사와 기독교사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스승 민경배 선생님의 말씀이 옳았음도 확인했다. 기독교 복음이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으로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사와 한국 역사를 직결시킨 실체라는 것, 신앙과 역사가 동떨어져 분리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 p.8
“한국의 마게도니아 사람(A Macedonian from Corea)”이라 불리었던 이수정의 편지는 조선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중국과 인도, 일본으로 향해 있던 젊은 선교사들의 방향을 돌려놓았던 것이다. 특별히 미국의 기업인으로, 뉴욕 브루클린 소재 라파이에트(Lafayette) 장로교회 교인이고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의 부원이었던 맥윌리암스(David W. McWilliams)를 감동시켰다. 맥윌리암스는 자신이 관리하고 있던 선교 헌금 5,000불을 쾌척했고, 이 헌금은 조선 선교의 발판이 되었다. 그의 헌금을 계기로 미국 북장로교회는 크게 고무되었고, 구체적으로 조선 선교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산둥성 선교사로 결정했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조선으로 보냈고 테네시대학 출신의 젊고 출중한 의사 헤론(John H. Heron)을 재한선교사로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55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지 분할에만 그치지 않고 감리교와의 교계예양(敎界禮讓, comity arrangement)을 결정했다. 효율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선교 지역을 분할해 선교하자는 제안을 수락했던 것이었다. 선교 지역 분할은 시간의 경제에서나 재정의 관리 그리고 새 선교 단체의 활동 개시 때에 제기되는 갈등을 극소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이었다.
1888년에 접어들면서, 북감리교와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빈번하게 회합을 가졌다. ‘영아소동’을 비롯해 선교사 배척 운동이 일어나면서 공동 대처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 회합에서 선교 구역 조정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고, 선교지 분할 문제가 정식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경쟁과 충돌보다는 연합과 협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1888년 3월, 북감리교 선교부를 대표했던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에게선교지 분할에 대한 기본적 원칙을 제시했다. 각 선교부가 부락을 나누어서 선교 사역을 하되, 이미 상대 선교부가 선교를 시작한 곳에 대한 선점권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단 그 지역의 교인들이 요청하면 이를 예외로 하기로 했다. 이 제안에 대해 언더우드는 부락 별로 나누지 말고 “도(道)와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선교 구역을 나누자”고 수정제안을 했다.
--- p.182
하디의 원산교회 회심 사건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스칸디나비아선교회(The Scandinavian Missionary Alliance) 회장인 프랜슨(F. Franson) 박사로부터 집회를 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 집회를 위해 하디는 원산의 전도자들과 속장 등 한국인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성경 공부와 기도회로 준비를 했다. 이때 로스(J. B. Ross)의 원산 병원에서 조수 일을 하던 최종손과 선교사 사택에서 일을 하던 강태수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들 속에 감추어진 죄를 고백하며 통곡을 했다. 사과와 보상을 약속했고, 그동안 형식적으로 믿은 것에 대해서도 통회했다.
1903년 10월, 1주일 동안 열렸던 프랜슨과의 원산 집회는 기대 이상이었다. 프랜슨은 서울과 평양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하디는 그가 돌아간 뒤에도 원산에서 집회를 계속 이어 나갔다.73 1904년 1월 5일부터 원산 남산동교회에서 인도한 2주간 열린 사경회에서 전계은과 정춘수 등 참석자 모두가 “성령 충만”을 외쳤고 헌신을 다짐했다. 1월 25일 원산지방의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선교사들이 함께한 연합 사경회 때에는 캐나다 장로교의 롭(A. F. Robb)이 “난생 처음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를 체험”했다며 울면서 죄를 통회했다.74 교인들은 앞 다투어 자기 죄를 고백했고, 집회에 참석했던 상당수의 일반인들도 덩달아 회개했다. 이구동성으로 생생하게 신앙 체험을 한 것은 처음이라는 고백이 끊이지 않았다.
--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