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인민에게 권력을’ - 루소 철학의 혁명성
평민의 영혼을 지닌 루소는 세기의 흐름에 맞섰다. 〈만약 과학과 예술의 부흥이 풍속의 순화에 이바지했다면〉(1750)이라는 첫 번째 논문에서, 그는 당대의 문명을 비판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을 변호하였다. “사치는 우리의 도시에서 백 명의 빈민을 먹여 살리나, 사실상 우리의 농촌에서는 십만 명을 죽게 한다.” 두 번째 논문에서(《인간불평등기원론》) 그는 소유권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에서는 인민주권론을 개진하였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가 권력을 각각 특권계급과 상층 부르주아지에 국한했던 반면에, 루소는 미천한 자들을 해방하고 전 인민에게 권력을 부여하였다. 루소는 개인적 소유권의 남용을 억제하고 상속에 관한 입법과 누진세를 통하여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국가에 부여하였다. 정치적인 영역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영역에서 평등을 촉구하는 이러한 주장은 18세기에는 새로운 것이었다. - 82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식비 비중 88퍼센트, 민중을 강타하다
18세기에 도시 민중계급의 생활 여건은 악화되었다. 물가 상승과 더불어 도시 인구의 증가로 생계비와 임금의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임금 생활자 계층의 빈곤화 경향마저 나타났다. …… 서민 생계의 본질적인 문제는 임금과 구매력에 있었다. 물가 상승의 압력은 인구의 여러 계층에서 생계비 구성에 따라 불균등하게 나타났다. 곡물 가격 상승이 가장 심했는데, 특히 하위 계층에서 인구가 증가했고 생계비에서 빵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자연히 민중층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
비극적인 결과를 야기한 것은 계절적인 가격 변동이었다. 1789년 직전 전반적인 물가 앙등 와중에 식비 지출은 이미 민중층 가계의 58퍼센트를 차지했으며, 1789년에는 88퍼센트까지 치솟았다. 식비 이외의 가처분 소득은 겨우 12퍼센트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물가 폭등은 여유층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으나 빈민층을 강타했다. - 61, 62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본질적 위기는 농민층 몰락
민중의 근본적인 요구는 여전히 빵이었다. 1788~1789년에 인민대중이 정치적으로 극히 날카로워진 것도 그들의 생계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경제 위기의 심각성 때문이었다. 1789년 대부분의 도시에서 일어난 폭동은 빈곤이 원인이었고, 그 폭동의 첫 번째 효과도 빵 가격 인하로 나타났다. 구체제 프랑스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농업 위기였던 것이다. 평작이나 흉작이 계속되면 예외 없이 농업 위기가 나타났다. 그러면 곡물 가격이 엄청나게 상승하였고, 곡물을 사 먹어야 하는 대다수 영세농들의 구매력은 감소하였다. 이런 식으로 농업 위기는 공업 생산으로 파급되었다. 농업 위기는 18세기 전체를 통틀어 1788년에 가장 극심하게 나타났다. 그해 겨울, 기근이 나타났고 실업으로 말미암은 구걸 행각이 급증하였다. 이 굶주린 실업자들이 혁명 군중의 한 축을 이루었다. - 64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최초의 혁명적 봉기는 어떻게 일어났나?
빈곤과 집단 심성으로부터 ‘소요’와 반란이 터져 나왔다. 1789년 4월 28일, 파리에서 벽지 제조업자인 장바티스트 레베용과 초석 제조업자인 프랑수아 앙리오에 반대해 최초의 폭동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선거인회에서 민중의 빈곤에 대하여 파렴치한 발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레베용이 노동자는 하루에 15수면 아주 넉넉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4월 27일에 시위가 있었으며, 28일에는 두 제조업자의 집이 약탈당하였다. 경찰국장이 군대를 투입하자 폭도들은 저항했고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최초의 혁명적 봉기는 분명히 경제사회적인 동기를 지녔지 정치적 소요는 아니었다. 인민대중은 정치적 사태에는 분명한 견해가 없었다. 그들이 행동으로 나선 까닭은 경제적·사회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의 소요는 권력을 위태롭게 하는 정치적 결과를 초래하게 마련이었다. - 65쪽(서론부·구체제의 위기)
프랑스 전역의 반란 - ‘도시 혁명’
지방은 특권 신분을 향한 제3신분의 투쟁을 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눈초리로 주시했다. 네케르의 파면 소식은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바스티유 함락 소식은 파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7월 16일부터 19일 사이에 전해졌다. 이 소식은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7월 초부터 몇몇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던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도시 혁명’은 실제로는 7월 초에 루앙에서처럼 식량 부족 때문에 발생해, 오슈나 부르주에서처럼 8월까지 근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디종에서는 네케르의 파면 소식이, 몽토방에서는 바스티유 함락 소식이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
도시 혁명의 이러한 양상은 어찌되었든 결과가 어디에서나 동일했다. 왕권은 소멸했고, 중앙 집권화는 무너졌으며, 거의 모든 지사들이 자리를 포기했고, 세금 징수는 중단되었다. 당시의 표현을 따르면, “국왕, 고등법원, 군대, 경찰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시 자치체가 구 권력을 이어받았다. 절대주의가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지방의 자율성이 자유롭게 작동하게 되었으며, 자치체의 생명력이 다시 풍성해졌다. 프랑스가 자치 공동체화한 것이다. - 169~171쪽(1부·국민, 국왕, 법)
1789년의 인권선언, ‘구체제의 사망 증서’
(1789년) 8월 1일, 의회는 토의를 재개했다. 인권선언의 초안을 작성할 필요성을 둘러싸고 대표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바로 이 점을 둘러싸고 토론이 벌어졌다. 심지어 몇몇 발언자는 선언의 시의적절함 자체를 문제 삼았다. 피에르빅토르 말루에같이 무질서에 놀란 온건파 인사는 권리선언을 쓸데없거나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레구아르 신부 같은 이들은 인권선언에 의무 선언을 덧붙이기를 희망했다. 결국 4일 오전, 의회는 헌법의 앞머리에 권리선언을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토론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 1789년 8월 26일, 의회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인권선언은 특권 사회와 군주제의 폐단에 대한 암묵적인 유죄 선고로서 ‘구체제의 사망 증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권선언은 계몽사상가들의 교리에서 영감을 받아 부르주아지의 이상을 표현했고,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의 토대를 놓았다. - 179, 180쪽(1부·국민, 국왕, 법)
혁명적 군중, ‘상퀼로트’는 누구인가?
혁명 당시에 ‘상퀼로트’로 불렸던 이들은, 바로 혁명적 군중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였던 이러한 오래된 형태의 민중적 범주였다. …… 1793년 4월 10일에 페티옹이 국민공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퀼로트를 말할 때, 우리는 귀족과 특권파를 제외한 모든 시민들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진 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상퀼로트라고 부른다.”
상퀼로트는 행동함으로써 특권계급, 상업, 유복함은 아니더라도 부유함 등에 대한 적대를 통해 스스로를 규정했다. …… 반혁명적인 노동자는 좋은 상퀼로트일 수 없었다. 애국파 부르주아는 기꺼이 상퀼로트의 자격을 갖는다. 사회적 차원은 정치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명확해진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었다. 여기서 핵심은 말뿐인 애국주의나 정신의 단순한 성향이 아니라, 정치적 태도였다. 상퀼로트는 혁명기에 일어난 모든 위대한 사건에 가담했다. - 747쪽(부록 1·혁명적 군중)
혁명정부와 상퀼로트의 대결, “혁명은 얼어붙었다.”
비록 긴급한 위험에 직면한 혁명정부가 상퀼로트와 동맹을 맺는 데 동의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몇 가지 양보를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상퀼로트적인 민주주의의 사회적 목표나 정치적 방법을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정부의 양 위원회에게는 민중 조직을 통제하고 그 조직을 부르주아 혁명의 자코뱅적인 틀 속으로 통합하는 것이, 대불동맹이나 반혁명에 대한 투쟁과 양 위원회가 지닌 정치적 개념에 비추어 정당한 일이었다. 따라서 코르들리에파의 반대가 이러한 평형 상태를 위협하자, 혁명정부는 탄압 조치로 응수했다. 그러나 상퀼로트들은 자신들의 열망을 대변해주고 지지를 받았던 〈페르 뒤셴〉과 코르들리에파가 제거되는 것을 목도하고는 혁명정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혁명정부가 당통도 제거했지만 헛일이었다. 이러한 중대 재판 사건에 뒤이은 탄압 조치는, 비록 제한적이었지만 투사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 구의 정치 활동을 마비시켰다. 이제 혁명정부 당국과 구의 상퀼로트 사이에 직접적이고 우애 있는 접촉은 단절되었다. 곧이어 생쥐스트는 “혁명은 얼어붙었다.”고 썼다.
- 440, 441쪽(2부·자유의 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