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감정 상태로 있어도 그 누구에게도 어떤 작은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는 순간이 있지만, 때로는 괴롭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 사람 모두가 신경 쓰지 않는대도 별 상관없지만 내 감정의 근원이 되는 너. 너에겐 아주 작은 의미라도 되고 싶은 것이다. --- p.25~26
진짜라고 믿던 마음, 진짜라고 믿던 날들, 진짜라고 믿던 약속, 모두 가짜 보석이었다. (...) 나는 가짜 보석을 잃었던 어린 날보다도 담담하지 못해 엉엉 울었다. 나에겐 왜 진짜 보석이 허락되지 않는 걸까 슬퍼했다. 다시는 가짜 보석에 속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나는 너를 만났고 나는 네가 가짜이든 아니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하며 너에게 달려갔다. --- p.32~33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달래기 어렵다면, ‘저 사람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생각하며 묵묵히 마음을 접자. 그리고 접은 마음을 종이배처럼 흘려보내자.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끔씩 이유 없이 하수구 막히고 그러는 거 윗집 아랫집 옆집에 사는 필부필부들이 매일 밤 마음을 흘려보내 그런 거라는 소문이 있다. 그런 후에 조용히 시나 한 편 낭송하는 걸로 깔끔하게 마무리하자.
“문자 해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찔러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 --- p.75~76
사랑답지 않은 사랑. 이별답지 않은 이별. 가슴에 못을 박는 것들은 대체로 그랬다. 적다 보니 무슨 단어를 붙여도 얼추 그러하겠구나.
답지 않은 것들이 늘 곤란해. --- p.114
그냥, 그 정도까지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별에 이런저런 수많은 이유가 따라붙곤 하지만 다 걷어내면 결국 ‘애정이 다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이 남았다. 그러니 상대방이 어떤 대답을 하든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p.156
몇 년 전엔 그리운 사람이 없는 것이 비통했는데, 지금은 그리운 사람이 없는 게 비통하지 않은 것이 비통하다. 몇 년 후엔 그리운 사람이 없는 게 비통하지 않은 게 비통하지 않아 비통하겠지. --- p.169
마음은 내가 그토록 접어버리려고 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더니, 어느새 기척도 하지 않고 슥 사라져 있었다. --- p.196
어느 날 네가 내 손을 잡는다면, 나는 그날을 기억할 거야. 어쩌면 지금은 예상하지 못하는 이유로 헤어질 수도 있겠지. 아무 이유도 없이 저절로 마음이 식어 헤어지는 날이 올 수도. 그래도 우리가 처음 손을 잡던 순간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올 거야. 너는 사라져도 순간은 남겠지.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해 또 계속 사랑하겠지. (p.204)
갈 곳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마음을 접어 홀가분한 기분으로 서랍에 넣어둔다. 어떤 마음은 어디로도 가지 않고 서랍 한쪽에 자리하기 위해 생겨난다. --- p.217
풍선을 놓쳐 속상해하던 꼬마가 아빠 품에 안겨 잠들었다가, 눈을 뜨자마자 다시 풍선을 보곤 펑펑 운다. 아가, 놓친 것을 너무 오래 바라보지 말렴. 소중한 것들은 놀라울 정도로 계속 네 앞에 나타날 거야.
연애는 같은 성질의 찰나들로 만들어가는 각자 다른 이야기다. 사무치게 아파하며 빠져나온 뒤 무의미하고 흔해빠진 이야기였을 뿐이라면서도 또다시 연애를 떠올리는 이유는 아마도, 수많은 찰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연애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나의 사소하고 하찮았던, 실은 가끔 사랑스러웠던 나의 결들을 향한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연애의 ‘원재료’인, 우리가 그리워하는 찰나와 결들을 기리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