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글이 논의한 두 가지 개념을 합친 ‘하나님의 마음’에 관해 성찰할 때, 기독교 세계관이 소위 냉철한 이성(객관성)과 뜨거운 가슴(주관성)을 함께 지닐 수 있다고 제안하고 싶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통하는 것, 즉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이 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전인격적이 될 수 있다. 마음은 지성뿐 아니라 감정을 담아내며, 그렇기에 성경의 증언에 토대해 하나님의 감정을 알고 느끼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을 온전케 한다. 예리한 지적 인식은 깊고 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지성의 제자도’뿐 아니라 ‘욕망의 제자도’가 필요하다.
_1. 하나님의 마음 알기
타락이 창조를 붕괴시키지 못했으며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임한 저주들은 사람과 창조세계가 벗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운명이 아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16을 근거로 이제는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창조의 능력과 타락의 한계를 간과한 심각한 잘못이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는 말은 타락 이후 벗어날 수 없게 된 남녀의 운명이 아니며 명령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사람들이 겪게 될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서술하는 것일 뿐이다. 여자와 남자 모두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기로 선택할 때, 남녀는 동등함과 친밀함 속에 살아갈 수 있다(창 1:27; 2:23-25).
_3. 타락한 세상은 운명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말하고, 그러니 그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는 논리는 비교적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일해서 번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은 흔쾌히 수긍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 대가는 자신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이 일해서 얻은 정당한 사적 소유조차 만나와 같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처분이나 사용도 여전히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균등해야 한다는 만나 경제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돈지갑이 회개해야 참된 회개라고 말했습니다. 세계관의 변화는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누군가의 필요는 나의 소유보다 우선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땀 흘려 번 돈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사용하는 것, 그것이 예수를 알고 우리의 세계관이 변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일 것입니다.
_9. 돈: 앎과 삶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
우리는 “소박한 밥상”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렌 니어링은 『소박한 밥상』에서, 불로 익혀 먹는 화식이 아니라 생식을, 생명을 죽여 만드는 육식이 아니라 채식을, 복잡한 가공 음식이 아니라 신선한 음식을 먹자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 모두가 무조건 “기독교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창조세계를 존중하고 음식이 부족해 어려움당하는 이웃을 생각한다면, 소박한 밥상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주제입니다. 우리의 밥상이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도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했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보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다락방의 식탁보다 너무 화려하고 기름지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가 함께 일용할 양식을 누리는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_12. 음식: 삶과 몸에 체화된 세계관
삶의 공간과 삶의 방식으로서의 세상을 구별하는 것은 세상과 관련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즉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말은 성도는 삶의 공간으로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 삶은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을 배(boat)와 물의 관계를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배다운 배가 되기 위해서는 물 위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배 안에는 물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배와 물의 가장 바람직한 관계다. 성도의 삶은 세상에서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세상의 방식이 스며들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종종 성도의 삶이 마치 물에서 꺼내져 마른 땅 위에 놓인, 그런데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찬 망가진 배와 같은 모습일 때가 있다.2 세상과 떨어져 사는 것 같지만 삶의 방식은 철저히 세상적인 경우가 그렇다. 이 배가 성도가 아니라 교회여도 이 비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는 항상 거룩하고 세상은 항상 악한 것이 아니다. 세상도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른다면 거룩하며, 교회도 그 방식이 하나님을 등진다면 얼마든 ‘세상적’일 수 있다.
_15. 세상: 하나님의 활동 무대
존 스토트는 자기중심성(self-centeredness)을 죄의 심각한 특성으로 말한다. 보통 자기중심성을 개개인의 차원에서 이해하지만, 그것을 인간 전체에 적용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사실상 하나님과 인간만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죄의 특성인 자기중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만 하나님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세계관이 얼마나 인간의 자기중심성에 매몰되어 있는지, 또는 우리의 세계관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지 성찰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과 동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다. 이런 점에서 동물에 대한 세계관적 성찰은 매우 중
요하다. 린지는 동물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인간의 자아 숭배라는 우상숭배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과연 우리의 세계관에는 동물이 차지하는 자리가 있는가? 우리는 동물이라는 창조‘세계’의 일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_18. 동물: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권력은 하나님의 일꾼이며 그 목적은 공의와 샬롬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이 항상 이런 신분과 목적에 합당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권력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 이것을 ‘시민불복종’이라고 부른다. 시민불복종은 단지 교회로 대표되는 좁은 의미의 종교적 영역과 권력이 충돌될 때만 요구되지는 않는다. 일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하기에,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요청된다.
_21. 시민불복종: 권력의 착각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통치 드러내기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