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목표는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를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규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 정체가 매우 다양하며 유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란 없는 것인가? 그것을 찾는 일은 부질없는 일인가?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정체란 어떤 특성으로가 아니라 열린 질문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찾는 일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한국 현대미술의 출발점이자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하듯이, 이 전 지구화 시대에도 한국인인 우리에게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찾기는 한국인으로서 살기 위한 길 중 하나다. --- p.10
한국 현대미술은 우리가 만들어온 미술일 뿐 아니라 우리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미술이다. --- p.43
김환기의 전반기 그림들에는 한국의 전통기물과 자연풍경이라는 정체성의 기호와 모던하고 인공적인 양식이라는 근대성의 기호가 공존한다. 그 양식 또한 구상적 이미지와 추상적 구성, 기하학적 구조와 비정형의 필치와 재질감 모두를 포괄한다. 그의 그림은 자국의 전통문화와 함께 선진제국의 미술사적 소산들에 동시에 노출된 제3세계 화가의 위치를 드러내는 시각적 지표인 것이다. --- p.84
권진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라다가 해방과 전쟁을 거쳐 분단시대를 헤쳐온 예술가들 중 그 “복판을 가로질러 나간” 흔하지 않은 예다.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 근대화에 대한 요구, 근원적인 것을 향한 염원과 새로운 세계에 부응하고자 하는 열망이 교차하던 이 시기에, 그는 그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하여 나름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문명의 시원과 고양된 정신의 경지를 표상하는 조각상들을 통하여 당대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이상세계를 현시한 것이다. --- p.133
나는 번역자의 능동적 계기가 두드러지는 경우 이러한 좋은 번역, 즉 의미 있는 오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다. 그리고 한국 앵포르멜에서도 그 가능성을 본다. 다른 언어 속에 갇혀 있는 앵포르멜의 순수한 의미를 ‘자신의 언어’를 통해 드러나게 한, 즉 번역자의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한 예를 한국 앵포르멜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p.198
단색화는 보이는 것처럼 그냥 단색이 아니다. 그것은 다색의 맥락에서 유래한, 또는 그것을 은폐하거나 통제하고자 한 주류 이데올로기의 회화적 버전이다. 단색화와 그 운동은 민족주의라는 ‘단색 이데올로기’가 미술을 통해 발현된 예다. 단색화는 당대 사회가 요구한 ‘한국적’ 현대미술의 시각기호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운동 또한 그것을 바깥과 안에서 지켜온 과정이다. 즉 밖으로는 더 큰 주류에 합류하면서 안으로는 상호 간의 동질화를 통해 강력한 주류집단으로 결속되어온 문화적 부계혈통의 보존과 확장의 역사인 것이다. --- p.251
단색화운동의 역사가 다시 쓰일 수 있다면, 이러한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소외된 것들을 복원하는 일이 그 주요 방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배제가 아닌 ‘포용(inclusion)’이라는 여성적 원리로 단색화운동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깨달음, 이것이 경쟁구도라는 남성적 논리로 이 운동을 조망한 이 글의 진정한 결론이다. --- p.295
우리 미술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대와 장소의 특수성이 미술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다. 그것은 고정되어 전수되는 어떤 실체가 아니며 시간적, 공간적 문맥의 드러남이다. 우리 극사실화에도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대 한국의 문화지정학적 특수 상황을 투영하는 점에 있으며, 그것이 또한 그 ‘사실성’이 될 것이다. --- p.345
“김구림처럼 이상한 것을 많이 한 작가도 드물다.” 어느 평자의 단순한 이 말은 다시 새겨보면 의미심장하다. 평생 ‘이상함’, 즉 ‘다름’을 추구해온 김구림의 작업은 제도권 미술사의 바깥에서 모든 종류의 틀을 깨는 것에 바쳐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 주체와 그의 작품 그리고 예술이라는 개념을 한정해온 틀과 그 절대적 권위를 문제 삼아온 그의 작업은 미술로 철학하기, 더 정확히는 미술로 ‘해체철학하기’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업은 해체론에 대한 예술이 아닌 “해체론이라는 예술”의 예증이다. 그는 해체론을 예술에 적용한 것이 아니라 작업을 통해 해체를 실행해온 것이다. --- p.396
민중미술은 실패한 운동인가? 현실 속에서 성취되지 않는 순혈주의는 공허한 외침일 뿐인가? 나는 “민중미술은 성공보다 주로 실패를 통해 그 존재를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라는 최민의 진단에 동의한다. 민중미술은 실패를 통해서 성공한 운동이다. 나는 민중미술의 실패에서,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숙명에서 민중미술의 ‘힘’을 발견한다. 불가능한 꿈에의 열정, 없는(ou)세계(topia)를 향한 유토피안적 열망, 거기에 민중미술의, 나아가 모든 예술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 p.454
정체성이 영원히 지연되는 타자들은 결코 일관된 주체로 통합될 수 없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일관성의 신화’라는 폭력을 비껴가고 나아가 그것을 제어할 수도 있다. 여성에게는 ‘아직 안 되는’ 것이 ‘스스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모순에 여성의 한계와 또한 가능성이있다. --- p.506
윤석남의 작업은 이처럼 삶의 짜임에서 유래하고 그 삶에 대한 구체적인 효과를 통해 의미가 드러나는 리얼리즘이자 수행의 미술이다. 그녀의 작업은 여성주의 미술의 생래적 국면을 드러내는데, 따라서 그녀가 걸어온 길은 실천적 운동에서부터 예술작업과 이론에 이르기까지 여성주의의 다양한 차원들을 포괄하며 작업의 내용과 형식도 여성주의 미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섭렵한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가능성으로 열린 진행형의 미술인 그녀의 작업은 ‘열린 과정’이라는 여성주의의 본성을 환기한다. 여성주의란 선험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 스스로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어느 여성학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 p.559
최정화의 기호들은 특정한 의미를 명시하지 않으면서 유동할 뿐 아니라 이런 과정을 통해 의미화(signification)의 경로 자체를 드러내는데, 그 경로가 바로 당대의 문화논리다. 다시 말해 그의 기호들은, ‘당대 한국’이라는 특정한 지정학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문화논리를 드러낸다. 그의 작업 전체가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말하는 하나의 기호인 셈이다. 그의 플라스틱 기호학이 또 하나의 기호가 되는 셈이다.
--- p.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