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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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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3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210쪽 | 304g | 148*210*20mm
ISBN13 9788937484391
ISBN10 893748439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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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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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왜 양복을 싫어하는지 알아요?
어느새 옷을 챙겨 입은 해정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다. 물기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다. 일직선으로 내리뻗은 머리카락도 구겨진 자국 하나 없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인지 땀 식은 몸에 한기가 돌아 박기영은 몸을 움츠린다.
- 나는요, 양복 말고 다른 거 입은 아빤 본 적이 없어요. 아, 딱 한 번 있긴 한데 그건 싫은 기억이니까 패스. 내 기억 속엔 양복 입은 아빠뿐이에요. 아저씨 만난 날도, 양복 입은 사람은 전부 아빠로 보일 거 같아서 싫었어요.
- 뭐가 그렇게 싫은데?
- 아저씬 찜질방 좋아해요? 우리 아빤 항상 찜질방에 가요.
- 찜질방? 그게 어때서.
- 찜질방에 가서는 자꾸 지구대 사람들한테 잡혀 오거든요. 성추행 상습범으로. ---pp.37~38

조건부 임시 동거인. 해정은 자신의 가족을 그렇게 정의한다. 이전 조건이 어땠는지 몰라도 최근 조건은 기간제, 앞으로 약 2년이다. 때에 따라서 3년, 4년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순전히 해정에게 달렸다.
- 큰애가 대학만 가면 끝이야.
엄마는 틈만 나면 그렇게 말했다. 대개 통화 중이었고, 그 상대는 가파르게 숨을 내쉬는 젊은 화가일 때가 많았다. 화랑에서 남자의 붓에 기금을 투자한다면 엄마는 남자의 몸에 이것저것을 투자했다. 조심성 없는 통화 덕분에 해정은 그가 한 달 전 엄마와 함께 성형외과에 가 식스 팩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
이혼한 부모라는 건 이제 별 얘깃거리도 안 된다. 새 학기마다 제출하는 가정환경 조사서에는 부모 관계란에 이혼과 재혼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다. 지금 당장 부모가 이혼한다 해도 해정의 수험 준비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 편이 부담 없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찌 됐든 해정은 단번에 대학에 붙을 작정이다. 그래야만 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꽃다운 20대를 만끽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대입에 실패해 이 우스꽝스러운 관계가 1년 더 연장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해정은 엄마와 아빠가 하루라도 빨리 헤어질 수 있도록 공부를 계속한다. 하고 또 한다.
엄마는 늘 여행 중이다. 남들 듣기 좋은 말로 여행이지 사실 파업에 가깝다. 흡족할 만한 퇴직금이 나올 때까지 무기한 파업. 버려진 직장에 관리인 격으로 해정과 해수가 남은 셈이다. 아빠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돈을 벌어다 주니 파업은 아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백지다. 파업과 유기. 어느 쪽이든 해정에겐 다 똑같다.---pp.41~43

언제 헤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부부. 아니, 헤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부부. 호적이라는 임시 고용계약서에 묶여 있을 뿐 실제로는 헤어질 필요조차 없는 부부.
해정은 엄마의 화장대 의자에서 일어선다. 방 안을 떠돌던 화장품 냄새는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이 집에는 더 이상 엄마의 꼿꼿한 등도 아빠의 고급 양복도 남아 있지 않다. 익숙하지만 결코 친근해지지 않는 적막. 해정은 서둘러 거실로 나간다.
거실에서는 언제나처럼 해수가 만화영화를 보고 있다. 해수가 반년째 등교 거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아주 사소한 문제다. 중요한 건 해수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집에 체온을 가진 이는 해정과 해수, 둘 뿐이므로.---p.44

- 안 궁금해요?
- ……뭐가.
- 그냥. 전부 다.
내가 왜 아저씨를 만나는지, 내 학교생활은 어떤지, 아저씨 앞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는 어떤 모습인지, 잠자고 일어났을 때 머리 모양이나 목소리는 어떤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어느 대학에 가고 싶은지, 생일이 언제인지, 내 동생 해수는 어떤 아이인지, 디지털카메라는 어떤 걸 쓰는지, 영화는 어떤 걸 좋아하는지,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음악을 듣는지, 운동은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간장에 조린 호두를 먹으면 알레르기가 일어나는지 아닌지, 숫자 8을 쓸 때 왼쪽부터 쓰는지 오른쪽부터 쓰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 안 궁금해요? ---pp.53~54

너무 다양한 색상은 예쁘다기보다 괴이하다. 분홍색과 덜 분홍색과 더 분홍색이 적어도 열 개씩 반복되는 곳에서 해정은 어지러움을 느낀다. 마주치는 거울마다 손톱자국이 선명한 해정의 목을 비춘다. 쇄골 근처에 흩어진 할퀸 자국은 파운데이션을 두껍게 발랐는데도 가려지지 않는다.
해정은 살구색 아이섀도를 목에다 마구 덧바른다. 테스트용 화장품을 꺼내 눈에도 볼에도 입에도 마구 문지른다. 화장품 가게에서 나올 때쯤엔 해정의 온몸이 오색으로 얼룩덜룩하다. 해정은 유리창에 비치는 얼굴을 보며 피식 웃는다. 낯설고 흉측한 것이 익숙함보다 좋을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해정은 가능한 한 낯선 얼굴로 약속 장소에 가고 싶다. 이전에도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결코 만나지 않을, 익숙해지지 않을 얼굴. 자기도 모르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타인의 얼굴로. ---p.122

선주가 아기 발목을 꽉 움켜쥔다. 가느다란 발목에서 오도독 뼈 부딪는 소리가 난다. 아기가 벼락같이 울음을 터뜨린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선주에게 있어 아기는 고장 난 녹음 인형 같은 것이다. 마음에 드는 기능이라곤 하나도 없다. 더럽고 시끄럽고 귀찮은 것들. 이런 것들은 왜 자꾸 튀어나오는 걸까, 성가시게.
20년 전에도 그랬다. 언니 몸을 난도질해 놓고 튀어나온 것 역시 더럽고 시끄러웠다. 오물투성이 비닐 위에서 발악하듯 울던 시퍼런 몸, 그 몸의 검은 얼룩들은 또 얼마나 흉측했던가. 다시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선주는 몇 번이고 아기 가슴에 주삿바늘을 꽂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 건전지를 빼 버리면 돼.
선주가 중얼거린다.
- 건전지를 빼 버리면, 전부 다 착한 아이가 되니까.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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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윤 소설은 잔혹하다. 그녀는 줄곧 우리 세계의 이면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집요할 정도로 세밀하게 파헤쳐 왔는데, 묘사의 수위에 관한 한 [우선멈춤]은 기존의 어느 소설도 보여 주지 못한 지점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문장을 경유하여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것이 이를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때로는 더 몸서리쳐지는 일임을, 이 소설은 자기 육체로서 증명해 보인다. 그러나 안보윤은 우리 삶의 깊숙이 자리한 이런 폐부들을 들추어내는 데만 집착하는 냉혹한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그녀가 이 잔혹하고 불쾌한 세상에 몰두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어떤 미덕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이 잔혹한 세계와의 대면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우리 눈앞에 놓인 세계 자체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부재하는 것, 상실된 무엇, 상실되었으나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일 것이다.
가족은 회생 불능의 상태에 이른 것이 사실일까. 다만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그게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위로 받고 위로를 줄 수 있는 공동체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인간은 오랜 시간을 누군가에게 기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보살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가족과 그 이후에 대해서.
정영훈 (문학평론가,경상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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