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 매우 다양한 형상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한 형상들을 하늘나라의 양상에 관한 하나의 일관적인 그림으로 짜 맞추기란 쉽지 않은?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일을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사후세계의 다양한 형상을 풍성하게 저장하고 있는 보고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목표를 암시해 주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 중에서 우리 삶의 특정 상황들이 필요로 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내 나름의 직감이다. (개정판 서문 중)
이사야는 거룩한 도시를 상업의 중심지로, 그릇, 상품, 그리고 상업 활동에 쓰이는 통화를 받아들이는 장소로 묘사한다. 낙타가 금과 유향을 싣고 미디안, 에바, 그리고 스바로부터 온다(6절). 도시는 게달의 양 떼와 느바욧의 숫양을 받아들인다(7절). 다시스에서 온 배는 은과 금을 싣고서 도시의 항구로 항해한다(9절). 또한 값비싼 목재―잣나무, 소나무, 회양목―가 레바논으로부터 수입된다(13절). 동물, 식물, 광물,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갱신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게 된다. (32쪽)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께서 구속하시려는 그분의 목적이 결실하도록 이끄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야곱의 집은 그들이 현재 부러워하는 것들을―그 기구들이 우상숭배의 기능이 씻기고 섬김을 담는 그릇으로 적합하게 변혁된 다음에―받게 될 것이 다. “이방 나라의 재산”은 치유되어야만 한다.
이 경우, 이러한 문화의 기구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현재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반역의 도구들과 우상으로 숭배하는 믿음의 대상들인 그것들을 증오하시며, 또한 자기 백성들에게 이러한 도구들과 대상들로 더럽혀지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증오로 말미암아 이것들을 섬기는 기구들로 적합하게 변혁하실 것이다. (45쪽)
죄로 물든 세상에서 인간 정부가 통치하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선한 창조의 일부로 의도하신 ‘정복’과 ‘지배’를 왜곡한 것이다. 죄의 저주는 왕위와 주권, 헌법과 법체계를 건드린다. 폭정, 억압, 그리고 조작은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 피조물을 위해 의도하신 선한 행정의 형식들이 왜곡된 사례들이다.
이 사악한 상황은 교정되어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변혁된 도시 안에서 정화되어야만 한다. 성경은 이것을 몇 번이고 분명하게 말한다. 죄로 물든 손과 마음으로 아주 부패하고 뒤틀린 정치권력은 그것의 의로운 원천으로 반드시 돌아간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비롯하는 권위를 오용한 자들이 자신들의 오류와 반역을 인정하게 되는 전체적인 정치적 청산이 반드시 있다. 하나님의 공정한 규칙은 틀림없이 공적 정당성을 성취한다. (70쪽)
적어도 최소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부의 민족, 인종 차별의 형식들을 폐지하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적어도 최소한’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공동체 바깥의 인종에 관한 불의에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이러한 실천을 하듯이 관심을 두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 한마디로,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형식의 차별과 아파르트 헤이트를 불법적인 것이 되게 만들었다. 차별 형식들에 억압받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미국의 흑인 침례교도, 캐나다의 성공회 에스키모, 러시아의 유대인,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베트남의 불교도든지 간에―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지금 초월되고 있는 일종의 인간 분류 체계가 야기한 고통에 맞서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106쪽)
위험한 일들은 이 요소가 어린양의 사역의 다른 중요한 차원을 배제하면서 강조될 때 생겨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지만, 또한 변혁된 도시에서 등불 역할을 하는 어린양이기도 하시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그분께서는 문화의 생산물, 공예품, 그리고 기구들을 그분께로 이끄실 것이다. 지상의 왕들이 그들의 권위와 권력을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돌려드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과 언어와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다국적 공동체를 피를 치르고 사셨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어린양의 사역으로서 온 세계를 범위로 한다. (123쪽)
어린양이 영원한 도시의 등불이 되리라는 사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매우 실천적인 방식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 승리의 어린양으로 묘사되시는 대목이라면 그 어디에서건, 그것이 자아내는 즉각적인 반응이 예배라는 것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다. 천국의 시민은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정중하게 엎드린다. 또는 그들은 경배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것이다. 요한부터가 거룩한 도시와 어린양을 보여 주는 이러한 전망에 너무 압도되어 이러한 일을 보여 준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엎드린다(요한계시록 22장 8~9절)―인간의 서투름을 거의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일화를 성경의 바로 그 마지막 장에다가 집어넣었다. (130쪽)
실제로,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한 도시의 전망을 답사하고 기록한 것은 ‘주님의 것들’이 매우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의도된 것이다. 다시스의 배와 레바논의 목재는―현시대에 이러한 물건들을 어떻게 왜곡하여 사용하건 간에―주님께 속한 것들이다.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의 정치적 구조에 대한 소유권을 계속 주장하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을 교화하시는 그분의 사역을 방해하여 인류가 현재 행하는 인종적, 민족적, 그리고 언어적 분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으실 것이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 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 (137~138쪽)
물론 우리가 천상의 도시를 탐색하는 데는 수동적 차원도 존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의 영혼에 넘쳐흐르게 해야 하고, 또한 그 빛이 영혼에서 따뜻함을 발산하게 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삶의 어두운 자리가 밝혀지고 치료받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빛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만 우리가 그 빛을 적극적으로 반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주님의 명령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가운데 우리는 억압과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의 빛을 나타내는 선한 행동을 할 권한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이 선한 행동은 이 땅과 거기에 가득한 것들이 실제로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시스의 배가 그 도시의 항구로 운항할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통치자들은 어린양께서 계신 곳으로 그분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부름을 받을 것이다. 많은 민족과 나라들에서 온 사람들은 새로운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데 합류할 것이다. (145~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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