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형 제3의 길’(Korean third way)이라는 한 국가에 특정한 우회로의 비유적 작명은 21세기의 2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나름대로 보편적 특성을 띤 것이라 자평하고 싶다. 2018년의 대한민국은 내부적으로 저출산, 고령화의 그늘 속에 불비한 복지 욕구가 분출하는 가운데 일자리 부족을 겪는 청년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2016년, 2017년에 걸친 국민적 촛불항쟁이 가져온 승리의 여운이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자발적 힘과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가능성으로 잠재되어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2018년의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의 결과로 지구상 유일한 한반도의 이념적 분단이 어떠한 제3의 대안으로 치유, 극복될 것인가에 놓여 있다.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 복지국가의 ‘제1의 길’은 공간적으로는 유럽, 미국 등 제국주의를 거친 제1세계, 시간상으로는 2차 대전 이후 약 30년간의 에너지집약적 성장만능주의라는 특수 상황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20세기 말 블레어, 클린턴 등이 주창한 ‘복지에서 노동으로’(from welfare to work)라는 제3의 길은 ‘서구적 제3의 길’로 해석되어야 하며, 대한민국 등 복지국가의 경험이 없는 많은 나라에서의 제3의 길은 복지 확대와 일자리 창출의 동시적 추진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본 저술에서 거론하는 한국형 제3의 길의 첫 번째 의미이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경제, 복지, 민주주의 등의 보편적 과제 외에도 미세먼지, 핵발전 위험, 쓰레기 대란과 같은 환경악화가 주요 민생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상황은 복지 확대와 일자리 창출, 또는 보편적 복지와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의 결합이라는 첫 번째 의미의 ‘한국형 제3의 길’을 떠받치는 경제성장의 신화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렇다면 환경 악화를 저지, 완화하기 위한 탈성장(degrowth)의 흐름에서 복지와 일자리의 동시적 증진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본 저술이 제시하고자 하는 생태복지국가(eco-welfare state)는 그에 대한 응답의 일환이지만, 아직까지 환경, 복지,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개입가설적 이념형의 수준에 그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설의 구체화를 위해 필자와 맥코브(Hahn & McCabe, 2006)가 제기한 ‘지구적 제3의 길’(global third way)의 재개념화 -제1섹터(국가), 제2섹터(시장)가 아닌 시민사회의 제3섹터가 주도하는 숙의 민주주의와 협치(governance)의 노선- 를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지구적 제3의 길의 한국화’에 따른 제3섹터 주도의 민주적 절차 확립이 한국형 제3의 길이 갖는 두 번째 의미에 해당한다.
두 번째 의미의 ‘한국형 제3의 길’의 지평에서 볼 때, 정부, 기업과 구별되는 비정부조직, 비영리조직은 이들과의 협력, 또는 갈등을 통해 복지 및 고용의 과제 외에도 생태적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지향하는 창의적 조직화에 나서야 한다. 이는 이론적 가정이기도 하지만, 정보통신기술과 사회관계망의 발달로 인해 한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의 시민참여나 미투운동처럼 자발적인 숙의적 절차로 더욱 가시화될 수 있다. 그 연장선 위에서 본 저술은 세 번째 ‘한국형 제3의 길’의 함의에 대해 대한민국 스케일에서 벗어나 남북한 및 동아시아의 화해와 협력을 둘러싸고 경제성장보다는 복지, 노동, 환경의 순위를 우선시하면서 사회-생태계(Social-Ecological System; 이하 SES)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가보지 않은 길’로 규정하려고 한다.
한국형 제3의 길이 갖는 첫 번째 의미가 서구적 의미의 복지국가 경험이 부재한 우리나라 특성에서 도출되었다고 한다면, 풀뿌리 거버넌스 위주의 두 번째 규정은 지구적 제3의 길을 노동연계복지(welfare-to-work)라는 서구적 경험으로만 협애하게 이해하지 않고 제3섹터의 주도성에 입각해 재정의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자의 경우 사회민주주의의 제1의 길이 정부라는 제1섹터의 주도로, (신)자유주의의 제2의 길이 기업이라는 제2섹터의 주도로 작동되는 것에 비추어, 지구적 제3의 길은 선진국과 후진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할 것 없이 제3섹터의 주도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설정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두 번째 의미의 한국형 제3의 길에서도 국가의 역할은 무시되지 않으며 다만 제3섹터와 국가, 시장 간 파트너십과 숙의적 과정에 주목할 뿐이다. 또 이것이 ‘한국형’으로 명명될 수 있는 까닭은 특별히 한국의 제3섹터가 강력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2008년의 광우병 사태, 2016년 이후의 ‘촛불혁명’ 등에서 나타났듯이 시민사회의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세력화가 독특하게 되풀이되는 데서 연유한다.
한편 세 번째 ‘한국형’ 제3의 길의 의미는 경제적, 정치적 측면을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사회적 가치(social value)에 근거하여 반추될 수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20세기 초 일본과 현재의 중국이 보여주듯 비서구사회 중에서도 서구적 가치를 혼용시키는 독자적 문화를 지녀 왔다. 그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은 서구가 추구하는 복지국가나 노동연계복지의 경제적 목표를 뛰어넘는 감정적(affective), 생태적 가치의 측면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국형 제3의 길의 세 번째 의미는 남북 분단의 생태적, 평화적 극복이라는 함축에서 더 나아가, 전적으로 서구, 또는 비서구에 소속되지 않아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탈)근대적인 아시아적 가치에 초점을 두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가족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의 전통에서 더 나아가 지속가능한 동식물 자연과의 공존 인식으로 확장될 수 있으며, 2018년 봄부터 전개되어 온 남북한의 통합 및 생존을 위한 녹색의 창조적 대안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2.
기존의 학계에서 제3의 길 정치와 노동연계복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그것이 한국에서 갖는 함의에 관해서는 토론이 모자랐던 감이 있다. 제3의 길의 ‘한국화’ 시도로는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productive welfare) 정책이나 노무현 정부 말기 사회투자 담론 등이 제기된 바 있으나 그에 대한 학술적 검토 역시 미진한 편이었다. 본 저술에서 다루는 ‘한국형’ 제3의 길은 서구의 ‘복지에서 노동으로’를 지향하는 유급노동 창출의 복지개혁과는 달리, 보편적 복지의 경험이 부재한 한국 특성에 맞추어 재분배 강화와 연계된 사회적 경제 및 사회적 가치의 활성화에 대한 고민에서 배태되었다. 이와 함께 냉전시대에 흔히 논의되었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뛰어넘는 본래적 제3의 길이라는 맥락 위에서 복지, 노동, 민주주의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환경악화에 관한 대응을 동아시아의 한반도 위기에 대한 평화적 해결과 접맥시키고자 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제3의 길은 굳이 서구적 경험에만 국한해,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신자유주의에 대처한 일자리 강조라는 협소한 차원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서구의 제3의 길이 갖는 ‘유급노동 회귀’로 편향된 근로연계형 경제주의 관점을 비판하고, 그것을 재분배 및 사회적 경제와의 연관성뿐 아니라 생태사회적(ecosocial)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재해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형 제3의 길에서의 관심이 생산적 복지에서 사회적 경제, 더 나아가 생태사회적 지속가능성으로 변화되는 결절점과 관련 사례들에 주목함으로써, 생태복지국가라는 이념형이자 현재진행형 대안의 구체화를 지향하려고 한다.
본 저술에서는 필자가 애초에 갖고 있던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을 SES 틀에 입각한 사회적 가치 및 지속가능성 개념으로 확장함으로써, ‘한국형 제3의 길’에 근거하여 생태복지국가를 탐색하는 데 시사적인 사례들을 탐색하고 있다. 필자의 문제의식과 저술 구도를 좀 더 자세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3의 길의 한국에서의 적용을 ‘한국형 제3의 길’로 규정하고 그 노선으로 가는 여정들을 서구에서의 제3의 길 논의와 지구적 제3의 길 관점 등을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 등장한 ‘생산적 복지’ 담론이나 사회투자국가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한국형 제3의 길의 세 가지 의미, 곧 복지확대와 일자리 창출의 결합, 제3섹터가 주도하는 숙의적인 사회적 경제 노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생태사회적 녹색 지향에 대해 입론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생태복지국가라는 이념형을 둘러싼 기존 논의들에 대해 예비적으로 검토하고 한국형 제3의 길 위에서 생태복지국가를 탐색하는 경로의 나침반으로 사회적 가치와 SES내 자산기초(asset based) 접근 등의 개념적 도구들을 설정한다. 이때 후술하겠지만 사회적 가치의 여러 측면으로 주관적 웰빙(well-being), 호혜성, 숙의성 등을, 자산기초 접근의 구성 요소로는 경제적 자산, 사회적 자산, 자연적 자산 등을 제시한다. 그런데 사회적 가치와 SES 등이 생태복지국가를 지향하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한다면, 생태복지국가의 구성 요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향한 극복 대상인 생태사회적 배제(ecosocial exclusion)와 지속가능한 발전의 내용이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본 저술에서 생태사회적 배제의 개념은 생태적 악화와 인간 빈곤의 동시적 발생 기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에 대응하는 담론과 실천이 생태복지국가의 얼개가 됨을 제시하고자 고안된 것이다. 또한 지속가능성 개념은 ‘정의로운 지속가능성’(Just Sustainability; 이하 JS)과 ‘중강도 지속가능성’(Moderate Sustainability; 이하 MS)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되는데, ‘정의로운 중강도 지속가능성’(Just and Moderate Sustainability; 이하 JMS)이라는 양자를 결합한 용어 또한 사용할 것이다. 이때 지속가능성의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와의 관련을 보여주는 JS에는 분배(distribution), 절차(procedure), 승인(recognition), 역량(capabilities)의 요소가, 지속가능성의 중간 강도 입장인 MS와 관련해서는 약한(weak) 지속가능성과 강한(strong) 지속가능성의 종합이라는 측면이 강조된다.
필자는 한국형 제3의 길을 찾는 데 기존의 생산적 복지나 사회투자국가의 담론도 어느 정도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생산적 복지와 그 정책수단으로 도입된 자활(self-sufficiency) 사업은 한국에서 최저생활에 대한 국민 권리를 최초로 인정한 것이다. 이 제도는 조건부 수급권자의 탈수급과 시장 복귀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생태적’ 측면에서의 자족과 결합시키는 ‘생태적 자활’이라는 생태사회적 차원의 자족 가능성 또한 열어두고자 한다. 사회투자 담론 역시 동반성장이라는 반생태적 지향과 종종 연결됨에도 불구하고 장기적 신뢰와 인적 자원 투자가 갖는 의의를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 저술에서 한국형 제3의 길에 입각한 생태복지국가의 탐색을 위한 매개변수로 고려하는 사회적 가치, 자산기초 사회정책, JMS 등의 개념은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한계가 사회민주주의적인 구래의 복지국가 전략에 의거해서는 돌파될 수 없다는 판단에 기초해 있다. 그리하여 결론에서는 서구에서도 최근의 논의인 탈성장 담론이 사회민주주의와 탈생산성주의를 결합시킴으로써 생태복지국가에 어떤 함축이 있는지 다루면서 본 저술의 탐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쨌든 필자의 시도가 완결된 패러다임이라기에는 미완의 문제 제기 수준이지만, 앞으로 생태복지국가의 현실적 지향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 서론 중에서